바우하우스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7.10.16
- 최종 저작일
- 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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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바우하우스에 대한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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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10년 전후의 유럽에서의 움직임은 이상과 같이 모든 19세기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메카니즘에 돌입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가 있다. 19세기에는 과거의 양식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부단히 20세기의 새로운 양식을 준비해 왔다. 그리고 그 20세기 양식이란 이제 바야흐로 과거와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메카니즘을 주체로 한 무기적(無機的) 시대를 특징짓는 양식임을 명시하였으며, 거기에서는 어떠한 전통도 시각적 대상도 일소됨으로써 두뇌에 의한 추상 창조와 기능과 형체의 문제가 핵심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20세기의 시대적 조형의 방법론을 기초로 하여 현대의 디자인 이념을 확립하는 것이 다름 아닌 ‘바우하우스’였다. 이 새로운 학교는 그때까지의 작센 바이마르 대공립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 발터 그로피우스를 교장으로 하여 1919년에 개교했다. 그 이름은 ‘국립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Staatliches Bauhaus in Weimar)’로서, 향후 십여년에 걸쳐 유럽의 창조적 노력의 최고 중심이 되었다. 1918년에 그로피우스는 츄링겐정부로부터 당시 바이마르에 있던 두개의 학교, 작센대공립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하나로 통합하도록 의뢰받았다. 그로피우스는 건축가로서의 그 능력이 이미 알려져있었는데 대전을 계기로 건축관이 넓어져있었다. 그는 아카데믹한 미술학교와 실제적인 공예학교를 통합하고자 하였고 당시 그로피우스와 같은 생각을 가진 벨데가 공예학교의 교장이 되어있어서 그 일은 더욱 쉬웠고 그로부터 ‘국립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Staatliches Bauhaus in Weimar)’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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