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운동의 전개과정
- 최초 등록일
- 2007.09.16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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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 동학(東學)의 발생과 당시의 사회상황
Ⅱ. 본론
1.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과 공주ㆍ삼례집회
2. 복합상소(伏閤上疏)와, 척왜양(斥倭洋) 운동
3. 보은ㆍ금구집회
4. 고부민란과 1차 동학 농민운동
5. 1차 동학 농민운동의 종결과 집강소(執綱所)체제
6. 2차 봉기로의 전환
7. 충청도 농민군의 참여와 공주전투
8. 공주전투와 농민군의 최후
Ⅲ. 동학 농민운동의 의의
본문내용
Ⅰ. 서론 - 동학(東學)의 발생과 당시의 사회상황
동학(東學)은 경주지방의 몰락양반인 최제우(崔濟愚)가 창시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진 종교이다. 당시 대외적 위기감이 고조되어 가는 가운데, 최제우는 유교사상을 극복하고 천주교에 대항하고자 새로운 종교를 개창하였다. 동학(東學)은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응할 만한 한국의 종교라는 뜻으로, 그 사상의 기본은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儒)ㆍ불(佛)ㆍ선(仙) 3교의 교리를 토대로 하여,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에 두고 있다. `인내천(人乃天)`의 사상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는 퇴폐한 양반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경전으로는,『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의 두 가지가 있으며, 이같은 교리를 바탕으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병장생(濟病長生)`을 제창하면서 급속히 보급되어, 3년만에 경상도 일대로 확산되었다. 이에 교단에서는 각 지부에 접소(接所)를 두어 이를 조직화하였다. 이와 같이 동학의 교세가 번창함에 따라 정부에서는 이를 사교로서 규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하여 1863년(철종 14) 교조 최제우 등을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체포하고 이듬해에 처형하였다. 이에 동학의 교세가 쇠미해지는 듯 하였지만, 2세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이 어려움을 극복하여 가면서 더욱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전부터 내려오던 접주(接主)제도를 확대 개편하여, 교인들의 일단(一團)을 `포(包)`라 하고 여기에 포주(包主)를 두었다. 이제 동학은 충청ㆍ전라도 등에까지 널리 유행하였으며, 그 조직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전개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조선사회는 내부적 모순으로 인해 점차 해체과정에 직면하였다. 농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더 심해졌고, 이에 농촌사회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농민항쟁과 변란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참고 자료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3, 역사비평사, 1993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4, 역사비평사, 1993
이이화, 발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한겨레신문사, 1994
유영익, 동학농민봉기와 갑오경장, 일조각(一潮閣), 1998
역사문제연구소 동학농민전쟁 백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동학농민전쟁역사기행-동학농민전쟁의 발자취를 찾아서, 여강출판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