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의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을 보고..
- 최초 등록일
- 2007.09.08
- 최종 저작일
- 2006.10
- 2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한국문화사의 리포트를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하여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는 선정하여 감상문을 쓰는 리포트였습니다.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작품에 대한 감상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작년 10월 28일 세계 6위 규모의 박물관이 개관한다는 소식에 용산을 찾은 적이 있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넘겨받은 뒤 덕수궁, 중앙청, 경복궁 등 6번의 분갈이를 거쳐 7번째로 용산에 뿌리를 내린 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찾은 국립중앙박물관은 개관할 때와 마찬가지로 깔끔한 용모로 여전히 끈이지 않는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더욱이 방문했을 때에는 루브르크박물관 전시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박물관을 찾고 있었다. 교수님께서 이 리포트는 내어주셨을 때 난 다시 꼭 우리나라 국보119호인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을 보고 오겠다는 다짐으로 친구들과 박물관으로 향했다.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것이 제일 기억에 남은 이유는 아마도 도둑맞았다가 다시 찾은 웃지못할 에피소드를 지녔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에피소드는 1967년 10월 24일 불상이 있던 자리에 남겨진 한 장의 메모로부터 출발한다. 메모에는 “오늘 밤 12시까지 돌려주겠다”는 내용이었고 문화재관리국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격으로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그날 밤 “한강 철교 16, 17번 침목 받침대 사이 모래밭에 있으니 찾아가라”는 전화가 와 불상을 찾을 수는 있었지만 범인은 잡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수난을 겪고 찾은 불상이라 그런지 한번 더 눈길이 가는 것 같다.
그리고 또 한국 사람들의 문제점이라 일컫는 지역연고주의 때문일까? 이 불상은 나의 고향인 함안과 멀지 않은 의령에서 발견됐다. 고구려 유물인데도 옛 신라의 땅인 경남 의령에서 발견되었다는 아이러니한 점이 나를 더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등 뒤에 새겨진 4행 47자의 명문으로 연가 7년 을미년에 고구려동사의 주지 등 40여명이 천개의 불상을 만들어 유포하는데 그 중 29번째 불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불상은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불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초기 금동불상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불상이 만들어진 그 깊은 의미는 잘 모르겠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