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 쇠망사
- 최초 등록일
- 2007.08.18
- 최종 저작일
- 2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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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왕조의 멸망에 대한 현상과 원인을 논한 글입니다.
목차
1. 高麗後期의 混亂相
2. 恭愍王代의 改革政治와 混亂
3. 威化島回軍과 李成桂의 執權
4. 高麗王朝의 沒落 原因
본문내용
1. 高麗後期의 混亂相
高麗는 元宗 11년(1270)에 武臣政權이 붕괴하고 蒙古와 강화를 맺음으로써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먼저 고려의 국왕은 元皇室의 駙馬가 되어 元을 통해 확고한 지위를 보장받으면서 왕권의 신장을 도모할 수 있었으나 元에 대한 고려 왕실과 관제의 격하를 가져오게 되었다. 元은 영토의 일부도 빼앗아 和州에 雙城摠管府를 설치하여 鐵嶺 이북을 속하게 하였고 西京에 東寧府를 설치하여 慈悲嶺 이북을 속하게 하였으며 濟州道에는 耽羅總管府를 두어 목마장을 설치하고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元은 高麗王을 만주 일대의 고려민을 관할하는 瀋陽王으로 봉하기도 하였는데, 忠烈王과 忠宣王의 경우는 문제가 없었으나 이후 심양왕과 고려왕이 두 사람으로 나누어지면서 양자 간의 대립이 발생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충렬왕 즉위년(1274)과 7년(1281)의 두 차례에 걸친 日本遠征으로 인해 인적 물적으로 무거운 부담을 안게 되었고, 이를 위해 同王 6년(1280)에 설치한 征東行省의 부속기구인 理問所가 元의 세력을 등에 업고 불법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元은 여러 가지 명목으로 각종 공물은 물론이고 심지어 童女와 宦官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海東靑의 징구를 위해 鷹坊이 널리 설치되어 元의 세력을 등지고 여러 가지 특권을 행사하여 폐해가 많았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權門世族이 대두하였다. 이들은 전기 이래의 門閥貴族家門, 武臣政權期에 득세하여 성장한 武臣家門, 武臣亂 이후 能文能吏의 新官人層으로 등장한 가문, 對元關係의 전개 속에서 성장한 가문 등으로 구성되었다. 권문세족은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왕실이나 다른 권문세족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들은 대토지소유자로서 田柴科體制의 붕괴와 더불어 합법 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대토지를 겸병하여 광대한 農莊을 소유하였다. 이러한 농장의 발달은 토지에 대한 공권력의 약화를 초래하였고 노비와 농민을 흡수하여 국가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는 등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다.
한편 일각에서는 권문세족과 성격이 다른 一群의 세력으로 新興士大夫(新進士大夫․新進士類․新興儒臣)가 성장하였다. 신흥사대부는 地方鄕吏이자 在地中小地主의 자제들로서 행정실무에 밝았고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科擧를 거쳐 중앙의 官界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보수적 세력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권문세족과 대립하였고 사회적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정치를 모색하였으며, 마침내 새로이 朝鮮을 건국하는 주체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2. 恭愍王代의 改革政治와 混亂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