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 최초 등록일
- 2007.08.07
- 최종 저작일
- 20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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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을미사변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 보았습니다.
목차
1. 을미사변 당시의 시대 상황
① 개화와 척사의 대립
② 임오군란
③ 갑신정변
④ 갑오개혁
2. 을미사변의 원인과 배경
①명성황후의 등장
②일본의 야욕
3. 을미사변의 진행과정
4. 을미사변의 결과
①을미개혁과 을미의병
②아관파천과 열강의 이권침탈
5. 을미사변의 영향
※참고문헌
본문내용
① 개화와 척사의 대립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을 한 후 조선 정부는 각 나라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먼저 일본에 제1차 수신사로 김기수가 파견되었다. 김기수는 조선에 돌아온 후 ‘일동기유’, ‘수신사 일기’등을 써서 조선에 일본을 알렸고 조선에 개화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어 김홍집이 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김홍집은 조선에 들어오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왔는데 ‘조선책략’은 우리나라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는 미국, 청, 일본 등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내용의 책이었다. 또한 정부는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고 ‘영선사’를 청에 파견하였다. ‘신사유람단’은 약 넉 달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중앙 관서와 세관, 조폐 업무, 제사, 잠업, 공업 등을 돌아보고 귀국했다. ‘영선사’는 김윤식을 사신으로 하여 유학생들이 함께 갔는데 청나라 텐진 기기창에서 무기 제조 기술을 배웠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들을 바탕으로 관제 개혁을 실시하여 최고 행정부로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12사를 두어 사무를 나누어 맡아 보게 했다. 또한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만들어 일본인 교관으로 하여금 교육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사상은 오랜 유교적 전통 사회로 이어져 온 우리나라에서 많은 배척을 받았다. 이렇게 개화사상을 반대한 사람들을 위정척사론자라고 하는데 전통적인 유교사상으로 무장한 이들은 서양이나 일본세력은 모두 오랑캐들이므로 화의를 해서는 안 되고 모두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참고 자료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기행-
맹란자 1998 세훈
명성황후-최후의 새벽 쓰노다 후사코 저 김은숙 1999 조선일보사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선전포고 없는 일본의 대러 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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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와 대한제국 한영우 2001 효형출판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아관파천 기의 국제관계 한국정치외교사학회 1998 동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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