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익산천도설의 문제점
- 최초 등록일
- 2007.07.14
- 최종 저작일
- 20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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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익산천도설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사실의 혼란
2. 새로운 해석
3. 익산 천도의 가능성
4. 도성체제의 문제
본문내용
익산 천도설은 익산의 왕도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 익산의 금마저와 부여의 사비성, 이 2개의 도시를 모두 왕도로 하는 도성체제를 유지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ꡔ구당서ꡕ 등에서 사비시대 국왕의 거소로 언급한 ‘동서 양성’ 기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사비성과 웅진성을 비판한 것이다. 웅진성은 방군성제가 시행됨에 따라 백제 왕성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이에 익산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여와 익산이 동서의 모양보다는 남북으로 위치하고 있다는 점은 문제가 된다. 또한 이러한 동서 양성체제에서 부여와 익산의 상호관계에 대한 설명이 미진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익산으로 천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여를 구도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부여의 위치를 여전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여가 익산보다 수도로서 기능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사비시대 백제의 왕들의 거소로 언급된 곳은 부여 이외에 익산이 아니라 웅진이었다.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도피한 곳은 웅진으로, 웅진성은 5방의 하나로서 사비성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여져 있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왕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비궁의 중수를 위해서 무왕이 임시로 머문 곳은 웅진성이었다. 이에 대해서 익산 천도설은 사비성 중수를 위해 무왕이 웅진성으로 거소를 옮긴 것에 대해서 무왕이 사비궁 중수를 몸소 지휘하기 위해 익산에서 웅진성으로 거소를 옮긴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딘가 어색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부여로의 환도 이후에도 여전히 익산을 왕도로서의 비중과 격조를 견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도 역시 그러하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