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발해 고고학
- 최초 등록일
- 2007.07.09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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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해 고고학에 대한 레포트 입니다
목차
1. 발해의 건국과 대조영
2. 발해와 고구려
3. 발해의 유물 - 유적
본문내용
1. 발해의 건국과 대조영
대조영 집안은 원래 속말말갈족으로서 말갈족 거주지에 거주하다가, 6세기 말 이전에 고구려로 옮겨와 정착하였다. 이들은 요동지방의 태자하 부근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말갈 추장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고구려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군사활동에서 커다란 기여를 하였으니, 대조영도 고구려 장수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구려에의 동화 과정도 진전되어 이들은 이미 순수 말갈족 상태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이들은 영주 지역으로 다시 옮겨졌고, 여기서 이진충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 거주하게 되었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대조영은 고구려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만주 동부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추격해오는 당군을 천문령(天門嶺)싸움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육정산) 기슭에 진국(震國:振國)을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오동산성(敖東山城)과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이 바로 그 유적지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유역과 만주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더구나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공(渤海郡公)이라는 관작을 수여하였는데, 이로부터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이렇듯 건국을 하였으나 대조영은 속말갈계 고구려인에 속하는 이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성이 대씨 라고는 하였지만, 돌지계의 경우와 같이 말갈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던 것을 보면 아직은 상대적으로 고구려화가 덜 된 단계의 인물이 아니었던가 추측 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