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와신채호
- 최초 등록일
- 2007.06.12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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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광수가 왜 그러한 선택을 했는가
신채호는 왜 그러한 선택을 했는가 라는
의문점을 풀어가는 레포트
목차
Ⅰ. 이광수 그는 왜 ?
Ⅱ. 신채호 그 의 선택은 ?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이광수 그는 왜 ?
3.1운동이 있은 직후 일제의 무단 통치 아래서 우리 민족은 항일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과 일본에 유학한 학생들의 2.8독립 선언은 3.1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에서는 신문화건설을 부르짖는 ‘문화운동’이 전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그 주체는 주로 청년회였는데, 이들은 인격수양, 풍속개량, 농촌개량 등을 내세우면서 신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문화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것은 개조론, 문화주의, 계몽주의 등의 사조였으며 이광수와 신채호도 이 시대 문화운동의 참여한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내용을 살펴보고 그 시대 상황과 아울러 이광수와 신채호의 행동을 이해하고자 한다.
[민족개조론]은 이광수의 논문으로 1922년 『개벽』에 발표된 것이다. ‘민족의 생활 진로의 방향 전환, 즉 그 목적과 계획의 근본적이며 조직적인 변경’ 이라는 민족개조의 의의, 역사상으로 본 민족 개조운동 등을 밝히고, 우리 민족 쇠퇴의 근본원인이 허위, 비사회적 이기심, 나태, 사회성의 결핍 등 도덕적인 이유에 있으며, 이것의 개조는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한민족의 장점은 인과 의, 예와 용임을 말하고, 민족성의 단점을 조직적, 교육적으로 개조하는 방법까지 제시했다. 이글로 그의 민족적, 문학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민족개조론]의 발생 배경은 1922년 9월 30일 밤, 이광수는 제등실(濟藤實) 총독과 만난다. 그리고 총독의 막후참모이자 경성일보 사장이던 아부(阿部充家)를 통해서 그는 수양동맹회의 규약을 사전에 총독에게 제출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20년대 정치모략의 주인공이었던 아부와 자주 만나 안창호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 해 가을 이광수는 총독부의 주선으로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되는데, 1922년 5월에 발표된 [민족개조론]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