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2007년 5월 간송미술관을 다녀와서
- 최초 등록일
- 2007.05.29
- 최종 저작일
- 2007.05
- 3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2007년 5월 19일 간송미술관을 다녀온후의 감상문입니다.
주로 정선에 대해서 썼습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어제는‘5 ․ 18 민주화운동기념일’을 추모하는 비가 내렸지만 오늘은 쾌청한 날씨였다. 부끄럽게도 나는 처음 박물관에 가는 것인지라 살짝 설레었다. 설레이다 보니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갔더니 결국 1등으로 도착했다. 하지만 어쩌면 교수님이 더 일찍 오신 것 같았다. 10시쯤이 되자 어디선가 스르륵 나타나셨다. 약간의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는데 차에서 주무시다 오신 듯 한 느낌을 받았다.
1936년 성북동의 선잠단 숲 속에서 한국 최초의 개인미술관이자 나라를 잃은 민족의 역사적 문화재 보호에 몸과 재산을 바치기로 결심한 ‘간송 전형필선생님’의 의지를 상징하는 아담한 2층 건물이 세워졌다. 이 건물이 지금의 간송미술관(전 보화각)이다. 지금으로 따져서 예를 들자면 한화그룹의 둘째 아들(간송선생님도 둘째 아들)이 북창동에서 놀지 않고 전국각지에 귀를 기울이며 모든 재산을 가지고 문화재를 수집하는 일을 하고 박물관을 설립한 것인데, - 물론 시대적 배경이 다르지만 -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금세 알 수 있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일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행방불명된 국보급의 문화재들이 재벌들 집안의 컬렉션에 보란 듯이 전시되어 있을 지도.
역시나 유명한 미술관이라서인지 이른 시간인데도 학생들부터 중년의 신사숙녀 분들과 고령의 어르신들까지 미술관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교수님의 쏙쏙 이해가 잘되는 간송미술관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마지막으로 감상할 때는 멀리서 보고나서 가까이서 세부를 관찰하라고 하셨다. 그리고나서 입장을 했는데 입장료를 낼 줄 알았는데 무료였다.
1층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2층부터 갔는데 역시나 많았다. 올라가는 계단은 역시 부의 상징인 대리석으로 쫘악 깔려 있어서 역시나 위엄을 더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했듯이 정말 아는 만큼 보였다. 이 수업을 안 들었음 이 미술관도 못 왔겠지만 만약에 왔었어도 지금만큼 유심히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2층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취은 정유승’의 ‘군원유희’였다. 조선시대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간신배 같은 이미지(?)의 원숭이가 등장한 그림이라서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전체적인 느낌은 동물원 밖에서 우리 안을 쳐다보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 실감나게 표현했는데 자세히 보니,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원숭이가 8마리인데 8마리라는 것은 중국에서 가장 좋은 숫자가 8(八)이라서 그런 것 같고, 4마리(성기가 보이는 원숭이)는 남자원숭이 같고, 성기가 안 보이는 원숭이는 여자원숭이를 표현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원숭이의 얼굴은 나이는 어리지만, 어렸을 때 한약을 잘못 먹어서 주름살이 생겨 늙어 보이는 정도의 모델로 그리지 않았을까?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