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인혁당 사건이 던지는 의미
- 최초 등록일
- 2007.05.29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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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혁당 사건이 던지는 의미에 대해 적었습니다.
2장 분량.
목차
4.9 인혁당 사건의 전모; 현대에 던지는 의미
-현대에 시사하는 의미
본문내용
4.9 인혁당 사건의 전모; 현대에 던지는 의미
인권이 유린당하던 시기, 국민의 세금에 의해서 세워진 군대와 국민 정부가 국민을 억압하던 때에 인민혁명당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지식인과 사회 유력인사들을 견제하기 위한 결과 중에 하나로서 1,2차 사건으로 전개되어진다.
1차 사건은 64년 8월 14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변란을 획책한 인민혁명단 사건을 적발하여 57명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중이라고 발표를 하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이사건으로 검찰에 중형 요청을 했지만 당시의 검찰 관계자들은 국가의 의도와 법조인으로서의 책임감인지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 처리를 하게 되어 유야무야(有耶無耶) 되어버린다.
그 후로 10년뒤에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지게 되는 2차 인혁당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74년 4월 중앙정보주가 유신반대 운동을 벌였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을 수사하면서 배후.조정세력으로 “인민당재건위”를 지목,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내에 지하조직이라고 규정한 사건이다.
유신 2년째인 74년은 재야단체 학원가의 유신반대 데모가 잇따르고 언론인 교수 종교인들 재야인사들의 유신반대 서명운동이 벌이는 등 현정권에 대한 불만이 거세어지던 때였다.
이사건으로 1천24명의 사람들이 연루되고 ‘인혁당 재건위 및 민청학련’ 사건에서 2백53명이 구속송치 되었고 인혁당 관련 21명, 민청학련 관계자 27명이 긴급조치 4호, 국가보안법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죄명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기소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