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자유시참변
- 최초 등록일
- 2007.05.12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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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자유시참변의 발생 배경, 파쟁의 연원, 참변의 발발, 참변 이후 독립군의 활동에 대해 상세히 준비한 자료입니다. 학점관리에 큰 도움이 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목차
1. 자유시참변 발생의 배경
2. 파쟁의 연원
3. 한인무장세력의 자유시집결과 군권투쟁
4. 이르쿠츠크파의 헤게모니 장악과 자유시참변 발발
5. 자유시참변 이후의 독립군 활동
본문내용
1. 자유시참변 발생의 배경
한국독립운동사상 세칭 자유시참변은 수많은 한국독립군이 시베리아 설원에서 무참히 죽어간 너무도 불행한 사건이었다. 일명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전해지기도 하는 이 참변은 사건의 현장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자유시에 집결했던 한국독립군 일부가 러시아 적군(赤軍)의 포위공격을 받고 쓰러진 참변인데, 이에 이르기까지 배경을 알아보겠다.
일제의 시베리아출병과 간도(間島)토벌작전, 레닌정권과 코민테른 : 공산주의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을 지칭.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제2인터내셔널이 와해 된 후 러시아의 V.I.레닌의 지도하에 각국 노동운동 내의 좌파가 모여 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립 된 것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사상적 기초로 중앙집권적 조직을 가지며 각국 공산당에 그 지부 를 두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통한 사회주의의 달성이라는 노선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 2인터내셔널과 구별된다.
코민테른의 대한인이중정책(對韓人二重政策), 그것의 실천으로서의 극동공화국 : 1920∼1922년 혁명 전 제정러시아령(領) 바이칼호(湖) 동쪽에 일본군과 러시아공화국 사이의 완충국으로서 세워진 민주주의 공화국. 수도는 베르흐네우딘스크(현 울란우데), 후에 치타. 동진 (東進)을 계속한 적군(赤軍)은 1920년 초 이르쿠츠크에 도달했는데, 공산당은 바이칼호 동쪽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적군(赤軍)의 전진을 멈추고, 또 한 극동지역에서의 소비에트정권의 수립도 피하는 방침을 취하였다.
극동공화국정부 및 볼셰비키 현지당들의 한국독립운동계에 대한 참견,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한국독립운동계의 민족파와 준공산파 또는 공산파와의 이중적 관련을 유지하면서 한인의 민족적 항일정력(抗日精力)을 총체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그 모든 요인들의 모순이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 폭발된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독립군 세력의 무장투쟁에 결정적 타격 및 파국을 가져옴과 동시에 민족주의 독립운동 진영이 더 이상 소련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게 하여 반공으로 기울게 하기도 하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레닌을 비롯한 러시아 볼셰비키들의 혁명구상이 비단 소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웅대한 “세계혁명”에 있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일제강점 하에 있던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한 세계혁명전략의 조선에 대한 공략 사례 중, 대표적인 예로 바로 레닌이 당시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이자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창당했던 이동휘에게 독립자금 2백만 루블을 제공하기로 밀약한 후, 1차 착수금으로 60만 루블을 건네주었다가 이동휘가 개인적 용도로 착복하여 써버린 일을 들 수 있다.
참고 자료
한민족독립운동사 4 (독립전쟁)편 1988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강의 1998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독립전쟁사 1989년 삼광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