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타임투킬>에 대한 감상문
- 최초 등록일
- 2007.05.01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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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화<타임투킬>에 대한 짦지만 정수의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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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같은 반 급우가 왕따를 당하고 있다. 이때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전체적인 분위기에 반하여 자신도 왕따를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하면서까지 왕따친구를 도울 것인가. 아니면 그저 방관만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당연한 듯하면서도 자신이 그러한 경우에 처하면 이 상황은 조금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떠한 전체주의적인 사회풍조에서 소수를 위한 도움에 손길을 뻗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타임투킬>의 영화처럼 백인우월에 의한 흑인에 대한 편견 소외는, 미국 초창기 흑인을 노예로 썼던 식민사관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본다면, 인종적 차별에 의한 갈등이 노골적인 상황에서, 전체적인 사회풍조에 대한 반감, 변혁을 시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딸을 강간당한 흑인남자의 피고인에 대한 복수는 물론 정당화 될 수는 없지만, 그 외적인 정황이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주목을 해보자. 백인 남자가 흑인 여자에게 저지른 만행, 하지만 인종적 편견으로 인한 사법제도의 무책임성. 그리고 그 흑인여자의 아버지에 대한 도움의 손길은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가 주목할 점이다.
이것은 과거 프랑스의 ‘드레피쉬 사건’과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드레피쉬는 프랑스 장교지만 단지, 유태인이라는 굴레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다. 전체적인 사회분위기상 드레피쉬는 죄인이고 드레피쉬의 무죄임을 밝히는 에밀졸라도 많은 힘겨움에 봉착한다. 이 둘 모두는 사회적 편견으로 인한 소수자의 어려움을 대변한다. 또한 이러한 편견이 나오기 까지는 인종이라는 ‘식민주의 시대’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앵글로섹슨족에 의한 백인우월주의, 게르만 민족주의의 부정적 양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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