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 최초 등록일
- 2007.03.24
- 최종 저작일
- 2007.03
- 3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이며, 널리 알려진 니콜라스 레닌이라는 이름은 1902년부터 사용한 필명이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중심인물로서 독일파 마르크스주의자인 K.카우츠키의 사회민주주의에 대립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후진국 러시아에 적용함으로써 러시아파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론가이자 사상가이다. 볼가 강변의 심비르스크(오늘날의 울리야노프스크지방)에서 교육자인 울리아노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심비르스크의 김나지움에 다니던 중 1887년에 학생봉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제적당한다. 같은 해에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계획에 참여하여 처형된 맏형 알렉산드르의 영향으로 혁명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다. 타교생의 신분으로 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 시험을 치러 일급학위를 취득하고 카잔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한편, 70년대에는 플레하노프에 의하여 러시아에 도입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목차
<레닌의 일생>
<레닌의 간단한 연표>
<레닌의 레닌주의에 대해서>
본문내용
권위주의의 저변에는 자발성에 대한 불신, 다시 말해서 역사적 사건들을 방치한다면 사회주의 국가의 실현이라는 바람직한 결과를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깔려 있었다. 예를 들어, 레닌은 노동자들이 공산주의 엘리트가 지닌 혁명적·계급적 의식을 필연적으로 습득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활동으로 얻은 생활과 노동환경의 개선에 만족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으며 바로 이점에서 전통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물리적 조건들이 노동자들에게 혁명의 필요성을 충분히 일깨워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레닌에게서 공산주의 엘리트(노동자 계급의 전위대)란 필연적 과정을 따라 사건들을 촉진시키는 촉매제 이상의 존재였다. 그것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정권획득 수단에 있어서 실용주의적이었던 레닌주의는 채택한 정책이나 권력 유지를 위한 타협들에 있어서는 기회주의적이었다. 전시(戰時) 공산주의(1918~21)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뒤 시장경제 체제와 사기업 활동을 다소간 부활시켰던 신경제정책(1921~28)은 이것의 좋은 예가 된다.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레닌주의의 무절제한 추구는 소련이라는 전체주의 국가를 탄생시켰을 뿐이다.
<레닌의 간단한 연표>
1870년 4월 러시아 심비르스크에서 출생
1889년 마르크스주의자가 됨
1891년 법률 학위 취득, 사마라에서 변호사로 재직
1895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등의 러시아 망명 정치가들을 만나기 위해 서유럽으 로 건너감
1895년 체포되어 투옥, 시베리아 슈셴스코예로 유배
1898년 나데주다 크루프스카야와 결혼
1900년 마르크스주의 최초 정치신문「이스크라」창간, 러시아를 떠나 망명생활 시작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