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박헌영
- 최초 등록일
- 2007.03.22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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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헌영에 대한 독후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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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일제시기의 활약
2. 권력의 분파투쟁과 몰락
본문내용
1. 일제시기의 활약
1.1 화요회의 가입
일제시기 이 무렵은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여 정착하는 단계였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축제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었기에 극동인민대포자대라는 이름으로 극동의 공산주의자를 초청했다. 이때 박헌영도 좌익 지도자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회의에 참석하여 레닌을 만났다. 다른 지도자들이 그랬듯이 그도 러시아 혁명의 열기와 레닌의 지도력에 깊은 감화를 받은 듯 하다.
박헌영은 1922년 4월에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 있는 동안 그는 러시아 정부의 후원 밑에 조직된 고려공산당 상해지부 책임자 김만겸 에게 여비를 받아 조선에 공산주의를 선전할 사명을 띠고 돌아왔다. 상해에서 안동으로 돌아온 그는 조선으로의 잠입을 기도하던 중에 임원근⋅김단야와 함께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지방 법원에서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의 형을 받고 1924년 1월 18일에 출옥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박헌영이 출옥한 1924년은 민족 해방운동 특히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눈부신 여명기였다. 출옥한 박헌영은 바로 신상연구회에 가입했다. 이 써클은 1924년 11월에 명칭을 화요회라고 고쳤는데 당시 회원수는 60여명이었다. 화요회는 후에 제1차 조선공산당 및 제1차 고려공산청년회의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화요회는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서울 청년회 계통의 ‘서울파’와 격심한 분파 투쟁을 벌이면서 ‘화요파’를 형성하였다. 박헌영⋅임원근⋅김단야는 화요회의 간부가 되었다.
1.2 조선일보 기자
박헌영은 신사상연구회에 가입하여 이 써클의 신흥청년동맹을 지도하면서 합법적인 사회적 직업을 얻으려 노력하다가 1924년 4월에 동아일보사 기자가 되었다. 그가 사회적 직업을 갖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가 동아일보사에 입사했을 때 동아일보사는 민족개량주의자인 송진우가 사장직을 사임하고 공산주의를 이해하던 허헌이 사장으로 있었다. 그는 얼마 후 조선일보사로 자리를 옮겨 편집국 사회부 기자가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