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
- 최초 등록일
- 2007.03.10
- 최종 저작일
- 2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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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 내용 및 해석, 변조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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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구려 제 19대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414년 장수왕이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은 사며석 비(四面石 碑)로 용화암으로 만들어 졌으며 높이 6.39m, 무게 37톤에 달한다.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國內城) 동쪽 국강상(國岡上)에 세워졌다.
광개토대왕의 재위기간은 391~412동안이며, 연호는 영락(永樂),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재위기간 고구려 영토 확장에 힘써 그 영토가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開原)∼영안(寧安), 동으로는 훈춘(琿春),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렀다. 이뿐만 아니라 중앙관직 신설, 수묘인(守墓人)제도 재정비 등 내정에도 힘썼으며 393년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는 등 불교를 장려하였다.
☞ 비의 위치
비의 소재지는 중국 집안시(中國 吉林省 通化專區 集安市)의 시청소재지인 통구성(通構城)으로부터 동북쪽 약 4.5km 지점인 태왕촌 대비가(太王村 大碑街)이며 비의 서남쪽에 대왕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는 태왕릉(太王陵)이 있다. 오늘날에는 1982년 중국 당국에 의해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주위에 철책 담장이 설치어 있다.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비 주위에는 철책으로 된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 비의 발견
비의 존재가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이나 그 이전의 기록에서도 비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이성계의 영웅담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에 비석이 있다는 사실을 적어 노고 있으며, 성종 17년(1487) 평안도 관찰사로 국경지대를 시찰한 성현(成俔)이 비를 바라보며 읊은 시도 있다. 이 후에도 비의 존재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지봉유설 芝峰類說』에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시조비로 오인되어 나타나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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