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生涯와 仁 思想
- 최초 등록일
- 2007.03.04
- 최종 저작일
- 2007.01
- 1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공자(BC 551~479)는 노나라 양왕 22년(경술년) 10월 21일(경자일)에 노(魯)나라의 수도 곡부(曲阜)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창평향 추읍(昌平鄕 郰邑)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부인 시씨(施氏) 사이에는 딸 아홉을 두고,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아들은 어려서 다리병신으로 죽고 말았다. 숙량흘은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안타까워하던 끝에 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안씨(顔氏) 집안의 딸 징재(徵在)를 새 아내로 맞이하였다. 이때 숙량흘의 나이는 예순이었고, 안징재는 열다섯이었다고 한다. 징재는 날마다 이구산(尼丘山)의 신령에게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어 이듬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공자이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이구산의 구(丘)의 자(字)와 형이 있었으므로 둘째라는 뜻의 중(仲) 자를 합쳐 중니(仲尼)라고 불렀다.
목차
1. 공자의 생애
2. 시대적 상황
3. 공자의 사상
(1) 정명주의(正名主義)
(2) 仁 사상
4. 영향
▶ 교육가로서 공자
▶ 개혁가로서 공자
▶ 공자(孔子, 이름은 丘, B,C 551-479)의 윤리 사상
▶ 참고 자료
본문내용
(2) 仁 사상
‘인’(仁)자의 출현 시기는 매우 늦다. 고대의 갑골 문자와 금석문에는 ‘인’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고대 서적 중의 하나인『詩經』에 나오는 두 편의 사냥노래에서 남자다운 외모 상을 지칭하는 형용사로 사용된 것과『今文尙書』에서 효의 개념으로 해석한 것이 전부이다. 이렇게 공자 이전에는 인에 대한 개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에 관한 의미까지도 모호했다. 하지만 춘추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인’의 의미가 넓어져서 ‘인품이 좋다.’, ‘인격이 높다.’라고 하는 전인격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공자에게 중시되어 군자 교육에 있어 최고의 덕목으로 되었다.
인은 공자사상의 정수이며 극치이다. 인에 대한 논의는『論語』총 482장중에서 58장이나 차지하고 있으며, 105자가 수록되어 있을 만큼 중요한 단어이다. 그러나 공자는 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거나 밝힌 적이 없다. 게다가 인에 대한 정의마저 상대에 따라 또 상황에 따라 다르게 가르쳤다. 인에 대한 가르침을 제자들과 대화중에 상대에 따라 적절히 다양한 의미로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자가 주장한 인의 뜻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① 직(直)과 예(禮)의 조화로서의 인(仁)
공자의 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요시되던 예악(禮樂)에 대한 공자의 견해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다. 예악이란 당시의 사회규범이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예악을 행하되 본의를 망각하고 그 형식(形式)만을 고수하였다. 禮云禮云이나 玉帛云乎哉아 樂云樂云이나 鐘鼓云乎哉아. 『論語』(陽貨篇)
이에 공자는 당시 사람들이 형식적인 절문(節文)만을 일삼고 예의 근본을 망각하는 것을 개탄하면서 예악에 대한 반성과 자각을 환기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