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재판]광해군, 박정희, 그들은 역사의 승자인가, 역사의 패자인가
- 최초 등록일
- 2007.01.25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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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박정희, 그들은 역사의 승자인가, 역사의 패자인가?
광해군과 박정희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그들의 업적을 바탕으로
역사재판을 한 내용.
조별조사 내용으로
상세하게 나와 있음.
목차
1. 집권배경
1)파란만장했던 광해군 즉위과정
2) 박정희의 집권배경
2. 업적
1) 광해군의 업적
2) 박정희의 업적
3. 비판점
1) 광해군에 대한 비판
2) 박정희에 대한 비판
☆평가☆
본문내용
1. 집권배경
1)파란만장했던 광해군 즉위과정
광해군은 선조의 두 번째 아들이자 후궁(공빈 김씨)의 둘째아들로 왕위에 오를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런 만큼 왕위 계승과정은 파란만장했다. 선조에게는 정실부인인 의인왕후가 있었다. 그러나 의인왕후에게서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다. 때문에 선조는 세자책봉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선조의 나이 40을 넘기게 되자 후궁 소생 중에서 왕세자를 책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당시 왕세자로 거론된 인물이 임해군·광해군·신성군이다. 그러나 후궁 소생 중 長子라 해서 왕세자로 거론되었던 임해군은 성격이 난폭해 일찌감치 왕세자 논의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광해군과 신성군 두 사람이 왕세자 후보에 오르게 되는데, 당시 선조는 자신이 총애하던 인빈 김씨소생의 신성군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다. 상황이 급박해진 선조는 당시 신성군이 아직 어리다하여 1592년, 평양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선조는 구원을 청하고자 명나라로 가고자 하였으나 의주로 피신하고, 광해군은 조선에 남아 일본에 대항한다.
세자 광해군은 전란기인 동안 분조를 맡아 군사를 모집하고 왜적을 물리치는 데 탁월한 능
력을 발휘했다. 당시 선조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 순화군에게도 함경, 강원도에서 근왕병을 모집하라는 임무를 맡겼는데, 이들은 오히려 백성들에게 체포되어 가토 진영에 넘겨지는 신세가 되었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들과 달랐다. 선조로부터 강원도 일대의 민심을 수습하라는 명을 받은 광해군은, 적진을 교묘하게 돌파하며 분조를 이끌었고 내전 비빈과 신위를 모시고 황해도, 평안도 등을 종횡무진하면서 여러 번 어려운 고비를 돌파했다.
이에 선조는 재위 27년(1594) 윤근수를 명에 파견해 세자책봉을 주청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거절했다. 임란 때의 군사 파견으로 영향력이 커진 명나라는 단지 형식적으로 행해 왔단 책봉의 관례를 깨고 이제는 직접 조선의 왕위 계승 문제에 간섭하려는 것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