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흥미와 도야(신문 및 기사 자료)
- 최초 등록일
- 2007.01.10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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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흥미와 도야`와 관련된 신문 기사 자료를 스크랩한 것임.
흥미와 관련된 실제 사례를 찾아 정리 하였음.
목차
[인물포커스] 美CPA 박차고 옷가게 창업 김정선씨
[특집] 공부한다, 고로 나는 짜릿하다
본문내용
[인물포커스] 美CPA 박차고 옷가게 창업 김정선씨
최근 내한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는 부자가 되려면 자신을 위해 사업을 하라고 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면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사업을 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가장 위험한 길이다. 하지만 위험을 피하고 봉급생활자들이 속한 E(Employee)군과 전문직 종사자 및 자영업자가 속한 S(Self-employed)군에서 산다면, 더 안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로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하게 될 수도 있다’고 기요사키는 일갈했다.
반드시 부자가 될 욕망에 불타지 않더라도 자기사업을 한다는 것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내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 명동의 패션쇼핑몰 밀리오레에서 1.2평짜리 옷가게 ‘이마상스’를 운영하는 김정선(金正善·39)씨는 공인회계사, 그것도 미국 회계사라는, 안정적이고도 명예로운 전문직을 박차고 지난해 의류사업에 뛰어든 사람이다. 》
그는 한국외국어대 불어과를 졸업하고 86년 도미, 미국 롱아일랜드대에서 기숙사 야간경비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경영학석사(MBA)를 땄다. 피나는 노력 끝에 회계사 자격증도 땄다. 그리고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 회계사무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한인상대였지만 ‘선생님’소리를 들으며 대접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한국, 끈끈한 정이 오가는 한국이 그리워 미국에 자리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써도 미국의 주류사회에 파고들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애시 당초 깨달은 터였다. 결혼한 몸이라면 그냥저냥 주저앉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외로운 노총각이었다. 94년 귀국해 꽤 큰 규모의 회계사무소에서 일했고, 선배들과 컨설팅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국내에 진출하려는 외국기업을 돕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느꼈던 이방인이라는 감정이 한국에서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미국식 회계처리는 한국사정과 잘 맞지 않았다. 게다가 97년 말 IMF사태가 터지자 일감이 뚝 떨어졌다.
“IMF가 아니더라도 늘 회의를 갖고 있었다. 어느 직업이나 그렇겠지만 회계사라는 일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남의 돈이 오가는 일이니까. 약속한 날짜에 맞추기 위해 밤을 새는 것도 비일비재하다. 어차피 밤새워 일을 해야 한다면 내 일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밤을 새더라도 자의로 잠을 못자는 것과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못자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어머니와 아내는 물론, 주변사람들은 그를 보고 “미쳤다”고 했다. ‘사’자 붙은 전문직을 버리고 옷 장사를 하겠다니. 그는 “내 사업을 키워 내가 회계사를 고용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식구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지난해 6월3일 1억5000만원을 들여 명동 한복판에 1.2평짜리 자기사업을 시작했다.
회계사에서 옷장수로 변신한지 1년,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봤다. “얻은 것은 자유다. 내 뜻대로 내가 기획해서 내가 돈을 번다. 회계사 때는 그 반대였다. 남에게 매여있었고, 나와 일의 관계가 부조화(不調和)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회계사는 안정적이고 사회적 명예도 얻을 수 있다. 옷 장사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안다. 지금은 딸아이가 어리지만, 그 아이가 커서 옷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아빠를 자랑스러워할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참고 자료
동아일보 2001/05/31 19:14
한겨레21, 331호/ 2000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