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프랑스 혁명의 제3신분에 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6.12.22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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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프랑스 혁명과 그 주체세력인 제3신분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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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789년 5월 베르사유에 소집된 삼부회에서는 제3신분대표들이 신분별 회의를 지양하고 국민의회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국왕 루이가 진심으로 새로운 프랑스 창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국왕은 베르사유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는 파리 시민을 긴장시켰으며, 파리 시민들은 무력탄압으로부터 국민의회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하였다. 무장하기 위해서 무기와 탄약을 찾던 일부 민중은 같은 해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던 초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민중의 눈에 압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함락은 혁명에 민중과 폭력이 개입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인류역사상 가장 전형적인 전체 혁명이었다. 그 원인, 과정, 그리고 후에 일어난 반혁명조차도 그랬다. 또한 프랑스 혁명은 산업혁명과 함께 서양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혁명 당시에 충분한 자유, 평등을 이룩할 수 없었던 점은 한계점으로 지적받는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원칙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이었으며, 헌법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났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원인(배경)은 앙시앵레짐이라 불리는 구체제의 모순이었다. 앙시앵이란 `오래된`, `낡은`이라는 의미이며, 레짐은 `제도`또는 `체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앙시앵 레짐은 근대 사회로 변모해 가는 당시 상황에서 이미 낡은 제도, 즉 봉건적 신분제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중산층 성직자였던 Abbe Emmanuel-Joseph Sieyes의 언급처럼 당시 프랑스인은 제1신분(고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계급간의 불균형이 매우 컸다. 전 국민의 1%도 안 되는 고위성직자들이 20% 이상의 토지를 비롯하여 많은 재산을 소유하였고, 1,2신분을 합쳐서는 전국토의 40%에 해당하는 토지를 소유 하였으나 면세특권이 있어 나머지 세금의 부담은 고스란히 평민들의 몫 이었다. 평민의 수는 전 인구의 96%에 달하였으며, 거기에는 가장 부유한 부르주아지로부터 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계층이 포함되었다. Sieyes의 언급처럼 1,2신분과 3신분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정치적인 의사표현과 정치참여 여부이다. 가장 부유한 부르주아든 도시의 걸인이든 이들은 이른바 국가적인 무대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Sieyes도 글 속에서 “정치체제 속에서 제3신분은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스스로 답변하고 있다.
참고 자료
1. 『제 3신분이란 무엇인가』, E. J. Sieyes
2. 『두산 대 백과사전』
3. 『서양사의 이해』, 임희완, <박영사, 1997>
4. 『프랑스혁명』, F. 블뤼슈. 1999
5. 서양사총론. 사하순
6. 프랑스 혁명사. 알베르 마띠에.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