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중국 명나라 환관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6.12.22
- 최종 저작일
- 2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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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명나라 시대 환관들의 활동과 전횡에 대한 레포트 입니다.
내용, 형식 깔끔하게 정리 되어있구요.
역사학 공부하시는 분들 도움되시겠네요.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본론
1. 환관의 기원과 역사
2. 명나라의 환관정책
3. 명나라의 환관정치
4. 명나라의 대표적 환관
1)남양원정에 성공한 환관 - 정화
2)막후에서 황제를 농단한 환관 - 위충현
Ⅲ. 나오는 말
본문내용
3. 명(明)나라의 환관정치
환관의 전횡은 영종(英宗)대의 왕진(王振)과 헌종(憲宗)대의 왕직(汪直) 등에서 비롯된다. 왕진은 영종을 황태자시절부터 보필하면서 전권을 장악하였다. 정통(正統, 영종의 연호)15년(1440)에 몽골족의 에센이 남침하자 왕진은 영종에게 친정(親征)을 강권하여 결국 토목보(土木堡)에서 영종이 포로가 되었고 왕진은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몽골로부터 석방되어 돌아온 영종의 복위에는 환관 조길상(曹吉祥)과 대학사 이현(李賢)의 공이 컸기 때문에 두 사람이 대립하여 전권을 행사하였으나 조길상이 군사정변을 계획하다가 주살되었다. 다음 헌종(成化帝)은 태감 왕직(汪直)에게 대권을 주니 환관전횡이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효종(弘治帝)은 환관의 정치간섭을 척결하고 정치를 쇄신하니 이를 홍치중흥(弘治中興)이라 한다. 그 후 무종(武宗)의 정덕(正德)년간에는 그의 황태자 시절의 근시환관인 유근(劉瑾), 마영성(馬永成), 장영(張永)을 비롯한 8인의 환관(八狐)이 전권을 휘둘렀다. 이에 대해 언관(言官)의 집단적 저항이 있었으나 환관의 기세를 꺾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유근은 첩보기구로서 서창(西廠)과 내창(內廠)을 새로 만들어 환관에 의한 정보정치를 더욱 강화하고 자신의 사가(私家)에서 황제의 조칙을 마음대로 행하니 내각과 6부가 모두 환관(閹黨)에 장악되어 환관의 폐해는 극에 달하였다. 당시의 속언에 ‘영락시대에는 환관이 관청에 들어오면 그 공손함이 이를데 없는데 지금은 환관을 옹부(翁父·어버이)라고 존칭하고 환관들이 관리를 호출함이 사노(私奴)를 부리듯 하고 고관(高官)들도 환관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인사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하였다.
유근의 전횡으로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나 정덕 5년에 유근은 주살되었다. 명대 환관의 발호는 명말 희종때 위충현(魏忠賢)에 이르러 환관파와 동림파(東林派)의 대립으로 그 정쟁이 절정에 이르렀고 결국 동림파의 실각으로 환관에 의한 정치·사회적 부패가 극심하여 마침내 명(明)의 멸망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명대의 환관정치는 한(漢)·당(唐)의 그것과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즉, 명대의 환관이 아무리 전횡을 하여도 그들의 악정(惡政)은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을 동안에 한하며, 일단 황제의 총애를 상실하면 곧바로 실각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당처럼 황제를 폐립한 예는 전혀 없었으니, 그것은 황제의 독재적 지위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어 있었고 중앙집권적 관료기구가 정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명대 환관의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의 활동무대가 중앙만이 아니고 전국각지에서 군사적 감독활동을 전개하면서 가렴주구를 자행한 점이다.
참고 자료
1. 동양사개론 신채식 삼영사, 1993
2. 인물로보는 중국역사 정성환 신원문화사, 1995.
3. 미타무라 타이스케 『환관』 하혜자 역. 나루, 1995.
4. 중국사 신승하 대한,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