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과 김부식
- 최초 등록일
- 2006.12.18
- 최종 저작일
- 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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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과 레포트 입니다. 역사속의 라이벌인 묘청과 김부식
두 인물에 대한 삶과 그리고 공통점과 차이점 등 분석한 내용입니다.
인터넷에서 퍼온 내용이 아니라 책을보고 연구한내용입니다.
그리고 두인물에 대한 개인적 견해등 의견을 적어 넣었구요
목차두 있고요 서론 본론 결론으로 논리정연하게 구성하였습니다.
아마 후회 안 하실거예요.
목차
• 서론
1. 들어가는 말
• 본론
1. 당시의 국내․외 정세
2. [인물연구] 묘청
3. [인물연구] 김부식
4. 묘청의 등장 : 서울을 서경으로 옮기고 분위기를 쇄신하자
5. 김부식의 반격 : 유교에 바탕을 둔 합리주의-
6. 서경반란 : 개경으로 진격하라
7. 묘청의 난에 대한 평가
• 결론
1. 묘청과 김부식의 대립에 관한 평가
( 오늘날 정세와의 비교와 고찰)
본문내용
서론
들어가며...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난이 조선 천년의 역사 이래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하였다. 그는 묘청의 난이 실패 했기 때문에 우리의 국토가 이렇게 좁아져 버렸다고 한탄을 했다. 그리고 중국에 굽신거리는 대신 그 시대 큰 권력을 향유했던 김부식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신채호가 있던 시기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아래에서 지배를 받았던 시기기 때문에 그가 김부식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하는 한편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여기서는 묘청이 서경천도와 금국정벌을 벌인 이유와 이를 말릴 수밖에 없었던 김부식의 입장을 살펴 보게다. 사실 그 당시 고려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금나라를 정벌한다는 묘청의 주장은 비현실적으로 들릴수도 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의 자주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한 이를 말렸던 김부식도 요즘에 와서는 문화 관광부에서 이달의 인물로 뽑을 만큼 다시 평가하기도 한다. 조선 천년의 역사를 두고 갈림길에 선 그들의 피하지 못할 숙명을 알아보자.
본론
고려 중기인 1135년, 묘청 일파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이 총사령관이 되어 1년여 만에 진압했다. 이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단순한 권력투쟁인가. 아니면 정책대결 끝에 빚어진 무력충돌인가. 단재 신채호가 이 사건을 자주와 사대주의의 갈등으로 파악한 이래, 그렇게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묘청과 김부식이 라이벌 관계였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를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립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국내정치에 대한 외세의 작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며, 정치적 야심이나 질투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역사적 사건의 본질을 개인의 심리적 차원 문제로 축소하는 것이다.
그 무렵 고려왕조는 사회변동기에 접어들고 있었으므로 뜻 있는 이들이라면 나름대로 개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묘청과 김부식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묘청은 풍수도참설에 바탕을 두고 천도 등의 비상한 조치를 수반한 제도개혁을 주장했으며, 김부식은 유교에 바탕을 둔 합리주의적 개혁을 주장했다. 이들의 라이벌 관계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이들의 사회개혁안과 정치관, 문학관 등의 차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