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고려 전기의 대외관계와 국제 무역
- 최초 등록일
- 2006.12.17
- 최종 저작일
- 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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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 전기의 대외관계와 국제 무역에 대해 정확하고 무게 있게
적어 보았습니다. ^^ 당연히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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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려왕조가 건국될 무렵인 10세기 초 동아시아의 정세는 복잡하였다.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중심세력이었던 당이 멸망 하였으며, 발해를 병합한 거란이 북방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루면서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였고, 이 시기에는 일본의 정치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동아시아의 이러한 정치적 세력들의 변동이 고려에 미치는 파장은 큰 것이었다. 그러한 회오리 속에서 고려는 살아남아야 하였고 나아가 이웃의 힘을 적절하게 이용하여야 하는 힘겨운 과업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단순 정치 관계가 아닌 실리를 얻는 실리외교, 등거리외교를 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과업은 국가를 보위하고 국익을 크게 하며 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행되었다. 당시 중국은 강력한 당 제국이 무너지면서 5대 10국의 분열과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마침내 이러한 혼란은 송에 의하여 수습되었으나 이전에 동아시아 세계에서의 당나라와 같이 강력한 중심 국가는 형성되지 않고, 고려*중국세력(송)*북방민족(거란) 3국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이는 다원적인 국제질서가 형성되었으며, 이 다원적 외교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 안정의 포인트는 고려가 되었다. 이 같은 고려는 왕조가 지속되는 내내 다원적 국제질서 속에 놓여 있게 되었다.
고려 전기의 대외관계에 있어서 한 축을 이룬 것은 중국세력과의 관계였는데 이는 정통왕조를 이은 송나라와의 관계이다. 이 관계도 역시 기본적으로 우호적이었으며, 두 나라는 여전히 북방의 강력한 정치세력의 압력과 위협 아래 놓여 있었으므로 두 나라가 친선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북방의 거란이나 여진을 견제․억지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도 두 나라의 입장이 비슷하였다. 즉 정치적․군사적 이해관계에 있어서 두 나라 사이에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실리외교로 인해 두 나라 사이에 통교 자체가 그친 적도 있었다. 이 실리외교는 압록강 일대를 편입시켜 강동 6주를 설치하고 후에 다시 통교를 하는 등거리 외교를 실시하여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한 고려의 외교 전술이다. 한국사의 어느 시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려 대외정책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시기에 고려의 대외관계에 있어서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던 것이 북방민족과의 관계였다.
이들 북방민족은 오늘날의 평안도나 함경도지역에서 고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는 북진정책을 추구하였고, 이에 맞서서 북방민족은 고려를 제압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이 둘은 모두가 영토를 둘러싸고 대립과 투쟁의 국면을 피해가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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