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향교를 다녀와서
- 최초 등록일
- 2006.12.14
- 최종 저작일
- 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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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향교는 주로 조선시대 지방의 유풍을 진작시키고 아울러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국의 크고 작은 고을에 설치했던 관학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향교의 설립은 고려 중기로 올라가며 고려시대 향교제도는 중국의 향교제도를 도입하였는데, 조선시대의 향교는 유교의 기본정신을 배우고 익히며 점검하는 곳으로 이는 사회 교화의 이념이 다름 아닌 유교이념이었고, 또한 유교정신, 유교윤리를 국가가 설립한 향교를 중심으로 실천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각 왕들이 향교설립을 통해 그 기반을 견고히 하려 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중앙에서 지방 군, 현을 획일적으로 쉽게 통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향교는 지방에 설치한 제사 건축인 문묘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문묘가 없으면 향교의 개념에 들지 않았다.
즉, 향교는 지방민을 교육하고 교화하는 학교이전에 `문묘`라고 하는 제사영역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 존재 의미가 있었다. 문묘는 전통적인 유학의 정신적 지주 역할로 그 존재가치가 컸던 만큼 향교 내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격식을 갖춘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외 서무35가 함께 자리하여 형성된 구역이다.
향교는 읍에서 비교적 가까운 한적한 곳에 설립하였는데, 향교의 전체적인 방위는 당시 고을의 북쪽에 주로 산이 있었기 때문에, 풍수지리학적 관점에서 문묘(文廟)의 남향 배치를 선호하였고 향교의 건물 배치 유형은 대체로 성균관의 유형과 유사한데, 문묘 공간과 강학(講學)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두 공간의 배치 형태는 지형에 따라 달라지는데, 존현(尊賢)의식에 의하여 문묘 공간을 우위(優位)에 두기 위하여, 평면적 공간에서 볼 때 문묘공간을 전면이나 동쪽에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우위에 있게 하거나, 강학 공간보다 높은 곳에 배치하여 고저(高低)의 차이로 우위에 있게 하였다.
이러한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향교가 위치한 지형이 전체적으로 평지인 경우에는 전면에 문묘 공간이 위치하고 동일한 축선상의 후면에 강학 공간이 위치하게 되는데, 이것을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 유형이라고 하고. 야산의 경사지일 경우에는 경사지를 3단으로 정지(整地)한 후 전면 제1단에 진입 공간과 제2단에 강학 공간이 위치하며, 후면의 가장 높은 단에 문묘 공간이 위치하게 되는데, 이 유형은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배치 유형상 가장 일반적인 것이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유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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