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과 이승만 정권
- 최초 등록일
- 2006.12.08
- 최종 저작일
- 2006.01
- 8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목차
<이승만의 남한정부수립운동>
<이승만의 워싱턴 로비활동>
<이승만의 입법의원 원격조정>
<좌우합작운동의 실패>
<이승만 정권 >
<1950년대 미국의 경제원조>
<1950년대 미국의 경제원조>
<1950년대 한국사회의 계급구조>
본문내용
<미소 양군의 분할 점령 >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 대한 일본제국의 무조건 항복이 가져온 해방은 한국인들에게 민족국가 재건의 기회가 되지 못하였다. 우선 중국에서 활동했던 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 용군 또는 조선 인민혁명군이 연합군의 일원이 되어 한반도에 진주하지 못했으 fQNs 아니라 임시 정부가 국제 연합의 창립회원국의 일원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옮긴 뒤 좌우익 민족해방운동전선을 통일함으로써 국제연합과 주요 연합국들의 승인을 얻으려고 노력했으나 특히 미국과 영국이 민족해방운동단체가 통일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승인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들이 한국을 독립시키는 경우 자기네들의 식민지들을 바로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독립을 주저한 것이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은 이미 카이로회담과 얄타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시기를 신탁통치를 거친 뒤로 잡고 있었다. 1943년 11월 12일 이탈리아의 항복 직후에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일정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 한국을 독립국가로 할 것”이라고 밝혔다.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의 20-30년 안과 스탈링의 WKfq을수록 좋다는 안으로 qkRNdjwls 뒤 다시 독일의 항복직후인 그해 7월 포츠담에서 4개국에 위한 5-10년 동안의 신탁통치로 바꾸어졌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대한 미국의 원자탄 투하로 일본의 항복이 임박해지 틈을 타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에 물밀 듯이 한반도 전체에 진주하는 것을 차단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밟아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게 된 해양세력인 미국과 대륙세력인 소련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하여 동북아시아에서의 세력균형을 이루에 되고 한민족으로부터 강력한 군사적 저항을 받지 않고 각각 점령지역 안에서 패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의 남북분할 진국과 점령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양대 서력권의 분계선을 확정한 것은 아니었고 일차적으로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임시적인 군사적 목적을 위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