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근의 전환기를 이끈 17인의 명암
- 최초 등록일
- 2006.11.29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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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희근의 전환기를 이끈 17인의 명암 -흥선대원군
(7장) 나라냐 가문이냐.
◎ 조선왕조 최후의 보루 “ 흥 선 대 원 군 ”
◎ 흥선 대원군에 대한 이희근 작가의 평가는 타당한가?!
◎ 내가 생각하는 흥선 대원군
목차
◎ 조선왕조 최후의 보루 “ 흥 선 대 원 군 ”
◎ 흥선 대원군에 대한 이희근 작가의 평가는 타당한가?!
◎ 내가 생각하는 흥선 대원군
본문내용
이희근의 전환기를 이끈 17인의 명암
(7장) 나라냐 가문이냐.
◎ 조선왕조 최후의 보루 “ 흥 선 대 원 군 ”
대원군은 국왕 고종을 대신해 1864년 이후 189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사실상 조선왕조를 다스린 ‘무관(無冠)의 제왕(帝王)’이었다. 흥선군 이하응은 아들이 철종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고종의 섭정이 되어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하였다. 흥선군 이하응의 집권은 어느 특정가문의 지지가 아니라 당대의 양대 세도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타협 하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이 집권할 당시 조선왕조는 농민봉기로 왕조의 존립 자체가 위협당하는 총체적 위기사태에 직면해 있었다. 집권층과 백성들 간에 왕조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가 당연시 되는 상황에서 개혁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를 진행한 인물이 흥선 대원군 이하응 이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과감한 대외정책과 국내개혁을 추진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먼저 그의 대외정책을 살펴보면 대원군은 밀려오는 서구열강과의 그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외교정책을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새겨진 척화비(斥和碑)를 세운 것은 그 단적인 예가 된다. 이러한 외교정책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의 승리로 외세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쇄국의 결의를 굳게 다졌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