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과 박헌영
- 최초 등록일
- 2006.11.29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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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근현대사 수업시간에 한 과제물 입니다.
목차
●서 론
1. 여운형과 박헌영의 재인식의 필요성
2. 여운형, 박헌영 연혁
3. 미군정기의 상황
●본 론
1.여운형 활동
1). 제1기: 1914년부터 1929년 7월10일 일경에 의해 검거 될 때 까지
2). 제2기: 1932년 출옥 후부터 1948년 7월 19일 암살당 할 때까지
2.박헌영 활동
1). 제1기: 박헌영이 최초로 공산주의단체에 가입한 1920년 11월부터 1945년 8.15 해방까지
2). 제2기: 1945년 8.15 해방부터 1956년 7월 19일 박헌영이 북한에서 총살당하기까지(남로당의 창당과 소멸)
●결 론
1.여운형, 박헌영의 나라인식
2.여운형, 박헌영의 재평가
본문내용
1. 여운형과 박헌영의 재인식의 필요성
우리는 60년 전 한국 민족의 장구한 역사상 단 한번 있었던 민족의 정통성과 역사의 단절의 시기였던 일제의 35년간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갑작스런 광복이었기에 해외에서와 국내에서의 조심스런 준비들의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 전개 되었다. 해방 후 민족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두 가지 시급한 과제가 있었는데 첫째는 자주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일이요, 둘째는 일제에 동조하거나 협력한 친일파 세력을 척결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문제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해방정국에서 궁핍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지고 정부수립 준비 및 국가건설을 시작하자니 인적 자원 즉 행정관료, 기술 관료, 기업인 등 일부 친일 경력 인사들의 존속 혹은 재기용 필요성이 인식되었던 것에 있다. 부일, 친일 인사들을 완전히 제거하게 되면 이들이 만든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하여 해방정국을 선도하고 나선 좌익 인사들이 대거 등장하여 정국을 장악하고 국가 건설의 방향을 새로 설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충분히 예측되었기 때문이다.
미소의 주도권 다툼은 미국당국으로 하여금 친일파 척결보다는 우익반공이념의 양양 및 친일파 행정경험, 기술보유자들의 존속을 허용케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해방 정국의 민족주의 세력은 친일 세력의 딜레마에 빠져 있었고, 후의 미군정기에 친일세력은 또다시 친미의 색깔을 띠며, 당시 사회의 주도권을 획득해 나갔다. 이시기에 바로 잡지 못한 사실들이 오늘날까지도 우리사회에 많이 검버섯 같은 존재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극우, 친일 세력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찾는 것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주의 세력을 몰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해방당시 사회주의 운동이 많은 왜곡된 사실들만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을 얼마 전 몽양 여운형선생을 비롯한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유공자 표창에서도 나타난바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과제를 준비하면서 당시 남한의 사회주의 운동의 양대 거두 여운형과 박헌영을 중심으로 특히나 그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활약했던 광복 후 미군정기 동안에 일어났던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의 사회주의 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 자료
김현우,『한국 정당통합운동사』, 을유문화사, 2000년
김갑동,『옛사람 72인에게서 지혜를 구하다』, 푸른역사, 2003년
역사문제연구소,『 한국 현대사의 라이벌』, 역사비평사, 1991년
KBS 인물 현대사,『여운형 편』, 2005년 1월 14일
임경석,『이정 박헌영 전집』, 역사비평사, 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