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대원군과 명성황후
- 최초 등록일
- 2006.11.27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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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원군과 명성황후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대원군의 집권
3. 명성황후의 등장과 대원군과의 갈등
4. 대원군의 실각과 재집권
5. 명성황후의 재집권과 을미사변
6. 나오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한국의 근대시절을 통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아마도 명성황후와 흥선 대원군일 것이다. 조선 시대 말부터 국운이 기울어 일제에게 국토를 강탈당하기 전까지 조선의 정치를 이끌어 간 것이 이 둘로 대표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명성황후는 외국 세력을 끌어들여 나라를 망하게 했고 흥선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행함으로써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이 둘은 첨예한 권력 싸움을 벌였다는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일생을 비교하면서 대립관계를 알아보고 그들의 권력 싸움이 조선의 정세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2. 대원군의 집권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은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南延君)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24세 때 흥선군에 봉해졌는데 당시 세도 정치를 실시하던 안동 김씨 일문이 그들의 권력에 걸림돌이 될 만한 왕손들을 과감하게 제거했기에 그 화를 피하기 위해 호신책으로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파락호(破落戶)처럼 생활했다.
<고종 가계도>
이처럼 ‘상갓집 개 궁도령’이라는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철종의 건강이 좋지 않은 사실을 간파한 흥선군은 그간 안동 김씨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풍양 조씨와 결탁하고 이윽고 당시의 가장 웃어른이었던 조대비와 만나 안동 김씨 일문에서 철종의 후사를 정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동조한 조대비는 흥선군의 차남 명복(命福)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1863년 12월초 철종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명복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익종대왕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자는 원로대신 정원용(鄭元容)의 발의를 채납하여, 12세인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봉하여졌으며 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을 요람하게 되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참고 자료
<원천사료>
1.『朝鮮王朝實錄』
2.『承政院日記』
<참고문헌>
1. 김우상, 『신한국책략』, 나남, 1998.
2. 윤정란, 『조선의 왕비』, 차림, 1999.
3. 최문형,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지식산업사, 2001.
4. 최문형,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2001.
5. 한영우,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효형출판, 2001.
6. 임종웅, 『다시보는 조선왕조 왕비열전』, 석천미디어, 2002.
7. 하원호, 『역사의 길목에 선 31인의 선택』, 푸른역사, 2006.
<참고논문>
1. 연갑수, 「대원군집정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2. 조성윤, 「임오군란의 사회적 성격」,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논문,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