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의 의의
- 최초 등록일
- 2006.11.26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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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수원 화성의 역사/정치사적 의의, 도시발달사적 의의, 건축사적 의의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역사적․정치사적 의의
2. 도시 발달사적 의의
3. 건축사적 의의
Ⅲ. 결론
Ⅳ. 참고문헌 및 자료
본문내용
1. 역사적․정치사적 의의
그림 2 지지대비 : 정조의 안타까운 마음에 행렬이 지체되곤 했다는 지지대고개의 비석과 비각.
화성성역은 1394년의 서울 정도 후 꼭 400년만에, 왕조 초창기의 서울 건설을 의식하며 이루어졌다. 또한 여기에는 정조가 즉위 20년을 맞으며 이제 확고히 영도력을 행사하게 된 휘하의 신민(臣民)을 총동원함으로써 그가 희구하던 왕권 주도의 정치구도를 일단락짓고 이를 통해 지속적인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이는 기존의 제 정부기구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이 될 만한 기능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연구소이자 친위기구인 규장각의 설치와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의 설치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다. 곧, 화성(華城)이라는 신도시 건설로 새로운 지역적 기반을 마련 함과 동시에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복권을 통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화성성역무렵의 구체적 정치적 상황을 통해서도 화성의 의의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정조의 어록에 다양하게 언급된 ‘의리(義理)’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을 통해 정조가 사대부의 청렴을 강조하고 당쟁을 경계했으며 나아가 지행양진(知行兩進)을 강조하여 실천 없는 성리학의 여러 담론들을 비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조가 의리를 강조한 것은 의리야 말로 인정이 안정되기 위한 삶의 지침이며, 결국 자신의 마음이 편안한 곳이 의리의 존재처라는 인식을 정조 자신이 갖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같이 의리를 중시한 반면 정조는 의리를 무기 삼아 타인에게 칼을 씌우는 풍조가 있다 지적하며 이는 의리정신에 배치된다 하여 비판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당시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국가의 방향성을 놓고 치열하게 전개되던 당쟁의 역기능, 곧 영조대부터 비판이 제기되었던 자작의리(自作義理)를 경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왕조가 성리학 이념을 국시로 했음은 재론할 필요가 없는데, 이 성리학은 정조대인 조선 후기에는 난해한 외래 사상으로서가 아닌 조선성리학으로서 확고하게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이에 따라 당시 사회는 춘추(春秋) 의리론에 입각하여 국가는 물론이고 사회 구성원들까지 그 기준에 의하여 삶의 지표를 설정했다. 따라서 명분과 의리는 모든 구성원이 동의하는 사회적 합의의 준거틀이 되었으니 국가는 바로 명분과 의리라는 기강을 세워 국민을 설득함으로써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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