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근대유적지 답사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06.11.18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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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천 근대유적지 월미도 답사 보고서입니다. 직접찍은 사진 있습니다
목차
1. 월미도의 역사
2. 월미도 유원지
3. 현지답사내용
4. 감상 및 소견
5. 참고자료
본문내용
1. 월미도의 역사
월미도는 효종(孝宗) 4년에 행궁(行宮)을 설치했다는 기록 외에는 조선시대 말기까지 역사에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는 작은 섬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개항의 혼란과 더불어 월미도는 근·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역사의 현장으로 떠오르게 된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한강하구를 찾아 인천항을 출입하던 프랑스 함대가 현재 작약도인 물치섬 앞바다에 정박한 이이 있었다. 그들은 월미도 함대 사령관이던 로즈(Pierre G, Rose)제독의 이름을 따서 로즈도로 명명하고 해도(海圖)에 기록했다. 이후 월미도는 조선 침략 수로를 탐색했던 여러 열강들에 의해 개항기 내내 ‘로제섬’이란 이름으로 불리면서 열강의 침략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1883년 인천항(제물포)이 정식 개항되고 월미도는 열강의 군함과 상선들이 서로 점유하고자 다투는 조차지로 전략한다.
1891년 1월 21일에 조선과 일본 정부사이에 조인된 「월미도조차조약」을 통해 월미도는 일본 해군의 두 번째 병참고 기지로 조차되었다. 그 후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틈타 조선에서의 세력 확장을 꾀하던 러시아 해군에 의해 다시 조차 되었다. 이어 1897년에는 미국의 스탠다드 석유회사가 월미도의 가옥과 전토 일부를 매입하여 저유창고를 건조하기도 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청일전쟁을 승리하고 한국을 장악하기 위해 러시아의 세력을 제압하려는 전쟁으로 분주한 일본은 1891년 월미도에 이미 저탄장 및 선박급수소를 설치하고 1904년에는 월미도를 군용지로 삼아 민가 및 묘소를 강제로 철거한 후 군용품 저장소를 설치하였으며 인천항과 월미도 사이에 철도용 목조교량을 가설했다. 같은 해 2월 9일 일제가 월미도 해상에서 러일전쟁을 승리한 이후, 이듬해에는 2월 9일을 ‘인천의 날’로 지정하여 자축하는 등, 일제의 손에 의해 월미도 일대는 풍치지구로 지정되어 유원지로 개발 되어진다.
참고 자료
-서적-
1.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인천광역시사⑥ 문화유산과 인물』2002 (p246~248)
2. 최재용 『월미도가 달꼬리라고』다인아트 2003 (p376~379)
3. 최성연 『읽기쉬운 개항과 양관역정』해반문화사랑회 1999 (p222~223)
4. 인천광역시 『동북아의 중심지 인천의 역사와 문화』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5. 신태범, 원용연 『인천중구의 옛 풍물』인천광역시중구 2003 (p10,p114)
2003 (p146~149)
-논문-
1. 김양섭 『제물포시대 인천의 표상과 그 기억』인천문화연구 제3집 2005
(p154~159)
2. 이형주 『배를타고 갈 수 없는 섬 월미도』
터진개문화마당황금가지 - 인천의 해안선을 따라서 2002 (p49~54)
-인터넷-
1. 한국문화관광해설사회 문화제자료 #월미도가 유원지로 개발되기까지 (2004)
http://www.heritagekorea.com/cgi-bin/technote/read.cgi?board=inchun&y_number=27
2. 네이버 블로그 『李 여사네』
http://blog.naver.com/annemyungg?Redirect=Log&logNo=40023266764
3. 네이버 블로그 『잊혀진 존재』
http://blog.naver.com/17001?Redirect=Log&logNo=60013542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