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과 발해
- 최초 등록일
- 2006.11.12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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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근대사회의 관찬사서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만을 인정하는 일통삼한론으로 일관하였기 때문에 발해가 자리 할 곳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발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 하였다. 한백겸『동국지리지』에서 발해가 고구려의 영토를 계승 한 것으로 보았고 발해의 건국자도 고구려 유민이라는 인식이 신경준의 『강계고』에서 나타났다. 더구나 유득공과 김정호는 각 『발해고』와『대동지지』에서 신라와 발해의 병립을 인정하는 남북국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강조 하면 발해의 위상이 약화되어 왔다. 다시 한 번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의를 알아보고 발해사의 역사의식의 변천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목차
1 머리말
2 신라 삼국통일과 역사적의의
3 남북국 시대의 의미
(1) 발해성립의 의의
(2) 남북국시대의 의의
4 인식의 변천
5 맺음말
본문내용
신라는 6,7세기에 있어서 내외의 국가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줄 알았던 국가의식, 국민의식, 문화 의식을 조화 있게 갖추고 있었다. 대내적 권력 투쟁도 서서히 안정 되었고 급격한 유혈사태에 의해 주체적 변혁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한편 신라는 중국대륙의 정세 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하면서도 먼저 작은 국제 사회인 삼국관계에 의하여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도 하였다. 당에 패권주의적 동방정책의 일환으로 신라를 끌어들인 셈이지만 다른 삼국에 비해 신라는 뛰어난 국제 감각으로 현실을 대처 하였다고 하겠다.
신라는 백제, 고구려를 패망시키기 까지 표면상 당과 주종관계에 있었으나, 그것은 신라의 자주성을 포기 한 것이 아니다. 신라는 고구려고지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당과 전쟁을 벌였다. 신라는 검모잠의 부흥군을 도와 당의 축출을 꾀하고, 안승을 맞이하여 고구려와에 책봉했다. 또한 부여융의 백제군과 당군을 격파하고 사비성에 소부리주를 설치함으로써 백제 고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당은 김인문을 신라왕에 임명하고 신라를 침략해 왔으나 신라군은 매소성 전투를 비롯한 일련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당군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당은 안동 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기고 한반도에 대한 신라의 지배를 인정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으로 성취 된 것이 아니라, 나당 전쟁을 통해 반도의 중남부를 통일함으로써 이룩했던 셈이다.
신라가 나당 전쟁을 통하여 반도 통일이라도 이룰 수 있었던 원인으로 여러 견해가 제시 되었다. 먼저 신라의 유연한 외교 정책과 화랑도의 탁월한 무사 정신을 비롯하여 불교의 역할과 신라의 대민정책 등이 거론 되었다. 『법화경』의 회삼귀일사상에서 삼국통일의 이념을 찾기도 하지만 일찍부터 통일 의지를 품고 있던 김춘추와 김유신 등은 전륜성왕사상 과 미륵신앙 등으로 새로운 미래 사회를 전망하며 천명사상으로 통일 전쟁을 합리화 했다. 또한 신라에서 중고기 이후의 군사조직은 지방민에게 크게 의존했는데, 지방민의적극적인 군사활동을 통일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으로 꼽았다.
이같이 신라의 영토와 인구는 종래의 약 3배로 팽창되었고 이것은 참으로 신라의 획기적인 발전이기 때문에 종래 삼국기의「신라」와는 달리 「통일신라」라 명명하는데 인색할 김영하, <신라 삼국통일은 타당 한가>(『역사비평』20, 역사비평사, 1993), 190쪽 통일신라를 중세라 하면서 ‘통일’을 빼고 ‘신라’라고만 하자는 것이다.
필요가 없다
참고 자료
이덕일,『살아있는 한국사』휴머니스트, 2003
김신재, 『강의한국사』서도문화사, 200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통일신라』국사편찬위원회, 199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발해사』, 1996
김상현, 『신라의 사상과 문화』, 일지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