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세사]무신정권
- 최초 등록일
- 2006.11.12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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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무신정권의 전반을 다뤘습니다. 이런 내용은 어디서도 찾기 힘들겁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된 한국사를 요약 정리했습니다.
목차
Ⅰ. 무신정변의 배경
Ⅱ. 성립기 무신정권의 성격
Ⅲ. 성립기의 무신정권
Ⅳ. 확립기 무신정권의 성격
Ⅴ. 확립기의 무신정권
Ⅵ. 붕괴기 무신정권의 성격
Ⅶ. 붕괴기의 무신정권
Ⅷ. 무신정권의 붕괴
본문내용
Ⅰ. 무신정변의 배경
무신란(武臣亂)은 김부식(金富軾)의 아들인 김돈중(金敦中)이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태우고, 기거주(起居注) 한뢰(韓賴)가 대장군 이소응(李紹應)의 뺨을 때린 것이 발단이 돼 의종의 보현원(普賢院) 행차 도중에 일어났다. 문반 5품인 기거주가 무반 3품인 대장군을 모욕한 것에 대해 정중부 등이 크게 격분하였고, 대다수의 문신들을 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사건은 결코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는데 왕을 시종한 무신들이 불평은 토로하자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는 정중부를 쫓아가 난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였고 정중부가 이에 동의하면서 난이 구체화된 것이다. 따라서 난을 계획한 인물은 이의방 · 이고였고 정중부는 그 자신이 직접 난을 모의하지는 않았다.
이상이 무신란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이고 12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려의 귀족사회가 분열되는 조짐을 보이게 된 것이 간접적인 배경이라 할 수 있다.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수리시설의 확충, 휴한(休閑) 농법의 극복을 통해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였다. 그 결과 증대된 수익을 둘러싸고 지배층과 일반민, 그리고 지배층 간에 치열한 다툼이 일어났다. 지배층과 일반민의 다툼은 지배층의 토지탈점 및 수탈강화와 그로 인한 일반 민들의 유랑으로 이어졌으며, 지배층 간의 대립은 정치권력을 둘러싼 정쟁(政爭)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결과로 표출된 것이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 그리고 무신란이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고려 전기 이래 무반에 대한 차별대우가 행해지고 있었다. 법제적으로는 문반(文班)과 함께 양반(兩班)을 구성하고 있으면서 관직체계나 경제적인 대우 등에서 동등한 지위를 보장받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반직은 정3품의 상장군(上將軍)까지만 마련되어 있어 무신은 2품 이상의 재상(宰相)이 될 수 없었다.
참고 자료
박용운, 『고려시대사』하, 일지사, 1989.
김당택 외,『한국사』18, 고려무신정권, 국사편찬위원회, 1993.
강만길, 『한국사』5, 중세 사회의 성립 1, 한길사, 1995.
김한종 외,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