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최근세 조선의 개화사상
- 최초 등록일
- 2006.11.03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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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화사상의 배경과 전개과정에 대해 정리했습니다.
조선 최근세사 공부하시는분들 도움 될거 같네요
깔끔하게 정리헸습니다. 읽으시기에 무리 없을거 같네요
목차
1. 개화사상의 개념
2. 개화사상의 형성과 분화
3. 개화사상가들과 개화활동
4. 개화사상의 전개
5. 개화사상의 성격과 평가
본문내용
3. 개화사상가들과 개화활동
한국의 개화사상은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계승하고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영향을 받아 1853~60년대 오경석ㆍ박규수ㆍ유대치 등에 의해 형성되었다. 전통사회의 진취적이고 선진적이었던 이들 개화사상 주창자들 중,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한 최초의 선구자는 중인 출신의 역관인 오경석으로, 그는 일찍이 역관으로 청나라의 베이징과 텐진을 내왕하여 열강의 침투와 이로 인해 붕괴되어 가는 청나라의 실상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청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가 곧 조선에도 닥칠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오경석은 베이징에서 중국의 애국청년들과 교제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귀국하면서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소개한 서적, 즉「신서」를 구입하여 가지고 왔다. 그는 철종4년(1853)년 이후 13차례나 베이징을 다녀오면서 <해국도지> <영환지략> <박물신편> <월비기략> <북격휘편> <양수기제조법> <지리문답> <해국승유초> <천외귀범초> <중서견문론>등의 새로운 지식이 소개된 서적들을 구입하여 돌아와서는 지인인 유대치와 후배인 김옥규ㆍ박영효등 젊은 청년들에게 읽기를 권하였다. 그리하여 홍영식ㆍ서광범등 개화독립당의 요인들은 물론 어윤중ㆍ백춘배ㆍ정병하 같은 청년 정치가들까지도 그의 영향을 받아, 이 나라가 문명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쇄국정책만을 고수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문호개방의 개국론을 부르짖게 되었다. 한편 박규수는 당시 조종의 중신으로서 개화운동의 선구자였으며, 우리나라 개화사상에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북학파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서 조부의 실학사상을 계승ㆍ발전 시켰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통하여 이용후생의 사상을 전개하였고 <양반전>을 통하여 평등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허생전>을 통하여 중상주의적 경제사상을 폈고,<예덕선생전>을 통하여 새로운 직업윤리를 내세운 실학사상가였다. 박규수는 이런 조부의 실학사상을 계승하면서 정약용ㆍ서유구ㆍ홍석주ㆍ남병철ㆍ신석우ㆍ김정희 등과 친밀히 교우 하였다. 박규수는 일찍이 「학문이라는 것은 모두 실사인 것이다. 천하에 어찌 실이 없으면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더 나아가 「문자로써 빈말이나 하는 것은 눈으로 실지의 일을 시험함만 못하다」라고 하여 역시 그의 가학인 실학을 계승ㆍ전개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고종 3년(1866) 7월에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미국 상선 제너럴 셔면호가 대동강으로 거슬러 올라왔다가 선체에 선원이 모두 소멸당한 사건 이후 개항을 강조하면서 기술을 배울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연경사실을 여러 차례 역임하면서 청국의 많은 지식인들과 사귀어 국제 정세에 밝았던 만큼 일본과의 수호에서도 그들의 감정을 격화 시키기 보다는 저들이 간청할 때에 서계를 수리하자고 대원군에게 여러 번 주장한 바 있다. 그의 재동집 사랑방에는 김윤식을 비롯하여 김옥균ㆍ박영효ㆍ서광범 등 개화파 청년들이 자주 모여 함께 박지원의 <연암집>을 읽으며 이용후생 사상을 연구하고 <해국도지>를 읽으며 부국강병의 길을 도모하고 지국의를 돌리며 시무를 토론하였다. 또한 유대치는 오경석과 같은 중인으로서 직업은 한방의 였으나 불교에 대한 수양도 상당하고 오경석이 청나라에서 구입해 온<해국도지>나 <영환지략>같은 서적도 제일 먼저 유대치에게 전달되었고, 유대치는 이 서적들을 읽은 후 김옥균등 양반층의 소장 선비들에게 보급ㆍ권장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