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문학관
- 최초 등록일
- 2006.10.30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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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연암 박지원의 문학관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목차라고 거창하게 할 것은 없고 간단히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목차
◎ 북학사상의 형성과 현실 개혁론
◎ 문학 작품
◎ 寫實 主義(사실주의)
◎獨創性(독창성), 自主性(자주성)
◎ 諷刺性(풍자성), 滑稽性(골계성)
본문내용
연암 박지원은 조선조 후기를 대표하는 이형적 문학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연암은 문학 이 科擧(과거)를 통해서 입신하는데 필요한 詞章(사장)도 아니며, 산림으로 물러나서 심성을 기르는 데 필요한 載道之器(재도지기)도 아니라고 여겼다. 그에게 문학은 落拓不遇(낙척불우)한 위치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선비가 할 수 있는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自覺(자각)을 바탕으로 실학을 문학을 통해 실천했다.
◎ 북학사상의 형성과 현실 개혁론
1760년 할아버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으며 이후로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 ( 朴齊家 ) ․ 이서구 ( 李書九 ) ․ 서상수 ( 徐常修 ) ․ 유득공 ( 柳得恭 ) ․ 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이 때를 전후해 홍대용 ( 洪大容 ) ․ 이덕무 ( 李德懋 ) ․ 정철조(鄭喆祚) 등과 이용후생 ( 利用厚生 )에 대해 자주 토론했으며, 이 무렵 유득공 ․ 이덕무 등과 서부 지방을 여행하였다. 당시 국내 정세는 홍국영 ( 洪國榮 )이 세도를 잡아 벽파 ( 僻派 )였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결국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했는데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는 이곳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였다. 1780년(정조 4)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다가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사절 정사로 북경으로 가자, 수행(1780년 6월 25일 출발, 10월 27일 귀국)해 압록강을 거쳐 북경 ․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참고 자료
연암집(燕巖集)
趙東一, <한국문학사상사시론(韓國文學思想史試論)>, P.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