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내용이 방대하고 복잡하지만 열심히 정리했습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백년전쟁의 원인
Ⅲ. 백년전쟁의 전개
Ⅳ. 백년전쟁이 가지는 유럽사회의 변화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영국과 프랑스는 서유럽의 양대 기둥으로 여겨진다. 로마시대 카이사르가 갈리아(프랑스)를 정복하면서 프랑스는 서양 문명의 전통에 합류하였다. 영국은 앵글로-색슨의 독자적인 문화를 꾸려오다가 1066년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영국 왕으로 즉위하면서 점차 서유럽으로 편입되었다. 때문에 프랑스의 왕과 영국의 왕은 기본적으로 서열이 다르다. 영국의 왕은 영국의 왕이면서 동시에 프랑스의 봉신 즉, 공 公爵 (duke) : 유럽 귀족 칭호로서 왕자나 왕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직위(대공 같은 중간 칭호가 있는 나라에서는 예외였음). ‘둑스’(dux)라는 칭호는 로마인들이 영토를 관할하던 고위 군 지휘관들에게 내린 것으로, 로마 제국에 쳐들어 온 이민족들이 그 칭호를 본 따 그들 왕국에서 썼고,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넓은 영토를 가진 통치자들에게 사용하기도 했다. 프랑스와 독일 지방을 다스린 카롤링거 왕조에서는 일찍부터 공작을 임명했으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힘이 약해지자 공작들이 점점 왕실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기도 했다. 이러한 관계는 당시 나타난 봉건적 지배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당시 프랑스 왕은 많은 공작들을 두고 있었지만 이들을 하나로 결집시키지 못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공작들도 하나의 국가라는 의식을 가지지 못했다. 즉, 이때 프랑스 왕은 왕이지만 많은 공작 중 하나의 세력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특히 노르망디와 부르군디와 같은 힘센 공작들이 존재했으며, 그 외에 공작들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아래 영국과 프랑스는 많은 갈등을 가졌고 결국 백년전쟁으로 표면화 된다.
역사에서 백년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1377년~1453년 동안 116년에 걸쳐 이루어진 전쟁이다. 사실 하나의 전쟁이 아니라 수차례의 휴전과 평화로 중단되었던 일련의 여러 전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기서는 프랑스의 봉신인 영국과 왕이었던 프랑스 사이에 생겨난 갈등과 이를 통해 나타나는 백년전쟁의 모습을 알아보고자 한다. 백년전쟁의 원인은 무엇이며, 116년간 전쟁이 어떻게 전게 되는지 그리고 백년전쟁으로 이후 유럽 사회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Ⅱ. 백년전쟁의 원인
1. 영토적인 측면
1259년 파리화약으로 헨리 3세는(1216~1272) 노르망디, 메인, 앙쥬, 푸렌느, 쁘와뚜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루이 9세(1226~1270)는 아뀌텐느 공령의 일부를 프랑스 왕으로부터의 봉터로 보유할 권리를 인정받는다. 즉, 영국은 프랑스와 봉신 관계에 있었다. 이때 영국은 가스코뉴, 아기텐 등 비옥한 남 프랑스 영토의 상당부분을 지배하였다. 카페왕조의 왕들이 대제후들의 봉토에 통치권 행사를 못하던 시대에는 다른 나라 왕이 그러한 봉토를 보유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필립 존엄왕(1180~1223) 치세이레 지배권을 확대, 강화 하던 프랑스는 노골적으로 영국의 축출을 원했고 이로써 영국과 프랑스는 가스코뉴를 두고 언제라도 대규모 전쟁을 일으킬 여지를 앉고 있었다.
참고 자료
브라이언 타이어니, 시드니 페인터 공저 공저, 이연규 역, 『서양 중세사』, 집문당, 2000.
∙ Daniel D. Mcgarry, James A. whal 공저, 이석우 역, 『서양 중세사 대요』, 탐구당, 1993.
∙ 김현수,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4.
∙ 앙드레 모로아 저, 신웅석 역, 『영국사』, 기린원, 1999.
∙ 콜린존스 저, 박문숙, 이호영 역,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시공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