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학문]독립기념관 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06.10.21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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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대문에 있는 독립기념관을 갔다와서 쓴 보고서입니다.
사진도 있어서 근현대사 수업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목차
1. 독립협회의 창립
2. 독립협회의 활동 중 독립문 건립에 대하여.
독립문 - 답사 가서 찍은 사진.
독립관.
3.독립기념관을 다녀와서.
본문내용
1. 독립협회의 창립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로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전개되어 일본의 침략행위와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1892년 2월 11일 국왕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을 단행하였다. 이른바 ‘아관파천’으로 조선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났지만 러시아의 통제를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독립국의 체면을 손상당하였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대내외적으로 국가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동시에 내정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서 국민적 통합을 이록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아관파천 후 고종은 친일적인 김홍집내각을 해산시키고 친미・친러적 성향의 박정양, 이왕용, 이범진 등 정동파 중심의 내각을 출범시켰다. 정동파내각은 아관파천의 불가피성을 알리는 동시에 신정부의 정당성과 정책을 홍보하고 친정부적인 여론을 조성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때마침 서울에서 발행되는 일본의 민간지 [한성신보]가 고종의 아관파천을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한 것을 계기로 정동파내각은 신문간행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신문의 역할을 가장 잘 알고 있었을 서재필을 신문발간의 최적격자로 선정하였다.
한편 1895년 12월 26일 귀국한 서재필을 김홍집내각의 협조 아래 중추원 고문직을 맡으면서 유길준과 함께 신문간행 사업에 착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공사의 방해로 말미암아 좌절당하였고, 심지어 신변의 안전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아관파천 후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 서재필을 갑신정변 당시 국민들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여 실패했던 경험을 교훈삼아 무엇보다 점진적인 교육을 통한 국민 계몽을 급선무로 인식하고, 정부와 국민 간의 상호이해를 도모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와 같이 정동파내각과 서재필을 모두 관민간의 이해촉진과 국민계몽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문발행에 대해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그 후 정동파내각은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서재필과 함께 4월 7일에 한글과 영문으로 된 [독립신문]을 창간하기에 이르렀으며 신문이 창간된 이후에도 그 보급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이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창간 및 운영과정에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창립초기에 [독립신문]을 통해 정부의 시책을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신문]은 국가의 자주 독립을 역설하고 근대적 민권사상을 확산시키는 데에 주력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