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골품제와 화랑도
- 최초 등록일
- 2006.10.10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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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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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골품제도
1) 골품제의 성립과정
2)골품제의 계급구성
3) 골품제의 사회적 성격
3. 화랑도
1) 기원 및 제정
2) 화랑도의 성격
3) 화랑도의 의의(기능과 역할)
4. 맺음말
본문내용
1) 골품제의 성립과정
신라는 경주에 자리잡은 사로국의 6부를 중심으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면서 성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복속된 소국의 지배층 가운데 일부를 경주로 이주시켜 지배층인 6부에 편입 시키고, 다른 일부는 원거주지의 촌주로 삼아 복속지역 통치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6부체제를 특정 짓는 이 같은 신라 초기의 정치체제는, 지증왕대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욱하는 6세기 초반에 해제되었다. 법흥왕 7년의 율령반포는 6부체제가 해체된 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인 관료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율령을 반포할 때 원래의 신라인과 경주 지역으로 이주해 온 지배층에 적용한 신분제가 골품제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관등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신라의 관등제는 경위(京位)와 외위(外位)의 이원적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골품제의 적용을 받은 경주인들은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경위를 지급받았다. 반면에 지방인들은 골품제 적용대상에서 제외된 채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외위만을 받았다. 법흥왕대에 정비된 골품제는 삼국통일 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변화하여, 문무왕 16년(674)에는 경위와 외위의 상등관계를 정하고 양자간의 공식적인 교류를 인정하는 단일 관등체제를 형성함으로써 경주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골품제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2) 화랑도의 성격
화랑도는 그 독특한 무사도로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삼국사기』에 수록된 화랑들의 전기를 보면 이 시대에는 화랑뿐 아니라 낭도나 일반 병졸에 이르기까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무엇보다도 전사를 명예로 여기는 무사도의 정신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다만 전쟁터에 있어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화랑집단의 성원들은 목숨을 가볍게 여겼으며, 이러한 무사도는 특히 화랑출신의 장군들이 모법을 보였다. 660 백제를 치기 위한 원정군의 주요한 장수는 김유신을 비롯하여 그의 아우인 흠순과 품일 등이었는데, 황산벌판의 싸움에서 품일과 김흠순은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하여 각기 아들인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을 전사하게 하였다. 김유신은 그 뒤 문무왕 12년(672)에 그의 아들 원술(元述)이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당군과 싸워 패전한 끝에 살아서 돌아오자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가훈을 저 버렸다는 이유로 그를 죽일 것을 왕에게 탄원한 적도 있다. 비록 원술은 왕의 비호로 목숨을 구하였으나 그 뒤로는 감히 아버지를 볼 수 없었으며,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어머니를 만나려 하였으나 끝내 어머니가 화랑도의 집단수련을 통하여 배양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와 춤이었다. 본래 노래가 정신교욱에 특히 청소년 의기를 북돋우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다른 민족의 청소년집단이나 전사조직과 마찬가지로 가무조합으로서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고 살 수 있다. 이 화랑도의 노래와 춤은 그들의 명승지 순례와 더불어 놀이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참고 자료
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 연구』일조각 1990
이기동 『신라골품제 사회와 화랑도』집문당 198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7(삼국의 정치와 사회 3 - 신라.가야』1997
이기동 『신라사회사 연구』집문당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