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김구와 이승만: 한국 현대사의 두 라이벌
- 최초 등록일
- 2006.09.20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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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과목에 제출된 보고서로서 A를 받았습니다.
김구와 이승만의 모든 행적과 사상을 비교하여 일목요연하게 서술하였습니다.
김구와 이승만을 비롯하여 현대사의 흐름을 이해하시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목차
서론
Ⅰ. 김구, 이승만 행적 비교: 출생부터 한일합방까지
Ⅱ. 김구, 이승만 행적 비교: 민족 항일 투쟁의 시기 (1910 ~ 1945)
결론
본문내용
김구와 이승만은 한국 근대사가 시작됨과 동시에 태어나 파란만장한 식민지 시기를 거쳐 현대사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이 위기를 겪을 때는 구국활동에 힘을 기울였고, 일제 식민 통치 하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주력하며 같은 길을 걸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현대로 들어오면서 두 사람의 노선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친일파 숙청과 통일 정부 수립을 외친 김구, 반민특위를 해제하고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단독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이들은 독립이 된 이후 완전히 다른 방향의 노선을 잡아 나아갔다.
현대에 들어와 역사의 라이벌이 되는 두 인물의 해방 이전 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연구가 될 것이다. 두 인물이 조국 독립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위해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어떤 다른 모습으로 시대에 영향을 미쳤는지 비교해보고 이를 바탕으로 근대사 속의 두 인물에 대해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려보았다.
연표를 보면 두 인물의 유년, 청년 시절은 상당히 많은 유사점이 있다. 태어난 연도가 1870년대 중반으로, 조선이 본격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바야흐로 한국사의 큰 위기가 닥쳐오기 시작할 때 두 인물은 일년의 터울을 두고 같은 황해도 땅에서 한민족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또한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한 운동을 하다가 수감되고 탈옥을 시도하였고, 각각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감형된 사실이 있다. 이를 보아 둘다 젊은 시절에 우리 나라가 외세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상당히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두 인물의 구국운동 모습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김구와 이승만이 참여한 활동들은 완전히 다른 노선에서 다른 방법으로 진행되는 것이었다.
김구의 한일합방 이전의 활동은 매우 파란만장하다. 종교적 활동에서만 보아도, 김구는 동학에서 불교, 다시 기독교로 두 번이나 종교를 옮기면서 구국운동을 펼친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아는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대표적 활동에 다양하게 참가하여 독립에의 의지를 불태웠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김구의 활동은 주로 당시 민중과 함께하는 활동이었다. 이는 아마도 김구 가문의 내력에서 받은 영향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구의 가문은 안동김씨이다. 대대로 벼슬을 하다가 김자점의 역모사건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경기도 고양을 거쳐 해주 서쪽의 백운방이라는 곳에 자리잡았다. 김구의 선조들은 양반의 문화 생활을 멀리하고 일부러 평민의 행세를 하였다. 그리고 이웃 양반으로부터 멸시를 받아도 제대로 항변하지 못했다. (백범일지 참조)
또한 김구는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독립운동을 넘어서서, 일본에 대한 상당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김구의 이러한 심리는, 을미사변 이후 명성황후의 시해자와 비슷해 보이는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칼로 난도질하는 매우 과격한 방법으로 처단한 데서 잘 나타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