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육][역사교육] 제주 4.3 사건에 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6.07.30
- 최종 저작일
- 20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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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주도 4.3 사건에 대해서 조사하고 그 사건의 의의에 대해서 고찰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1. 제주 4·3사건
2. 제주도민의 높은 교육열과 사회의식
3. 당시 미군정에 대한 제주도민의 불만
4. 제주4.3 사건의 시발점 - 3·1절 기념 행사
5. 미군의 책임 회피와 사건의 고조
6. 제주 4.3사건의 발발
7. 4.3사건에 뒤이은 10·19 여순사건
8. 무자비한 집단 학살
9. 제주 4.3사건에 대한 결론
본문내용
1. 제주 4·3사건
제주 4·3은 한마디로 미군정 아래에서 한민족이 안고 있던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난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을 제대로 보려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으로 분할되던 냉전 상황과 그리고 제주도의 정치·경제·사회적 여건, 그리고 저항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2. 제주도민의 높은 교육열과 사회의식
제주도에는 1920년대부터 제주∼대판간 직항로가 개설되어 군대환(君代丸) 등의 정기 여객선이 운항되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일을 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전쟁이 끝나자 일본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광복 직후의 제주는 25%라는 전국 최고의 인구 변동률을 기록할 정도였다. 돌아온 사람들은 일본에서의 치열한 삶 속에서 일정한 민족 의식과 사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 중에는 대학 교육 등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많았다. 광복 직후 건국 준비를 위해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마을마다 학교를 설립하는 등 자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당시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제주 특유의 공동체적인 삶을 바탕으로 중앙과는 다르게 좌와 우의 대립 없이 온건하게 일을 추진해나갔는데, 항일 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되어 지역 주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중앙이나 전남 인민위원회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으며, 1947년 3·1절 발포사건 이전까지는 미군정과의 협조도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뜨거웠던 제주도 교육 열기는 1945년 8월부터 1947년 12월 사이에 중등 학교 10개소, 초등학교 44개소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B.Cumings)는 1947년 2월 시점에서 전국 각도 15개 군의 15세 이상의 남자를 대상으로 초등학교 이상의 졸업생 비율을 분석했는데 그 결과 북제주군이 35.7%로 교육 수준 1위로 나타났다고 밝히고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