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혁신정당의 7.29총선거 참패 이유(한국현대사의 이해)
- 최초 등록일
- 2006.07.17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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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4.19라는 열려진 공간에서 혁신 정당이 1960년 7.29 선거에서 참패한 이유에 대해 분석한 글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7 ․ 29총선거 참패의 원인
Ⅲ.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진보정당은 크게 보아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다. 하나는 가시적이고 단기적으로 나타나는 목표로서 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어 의회에 진출, 국가정책을 보다 진보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비가시적이며 중장기적인 목표로서 직접적인 선거 결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합법적인 정당 활동을 통해 민중등 지지획득세력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고 주체형성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진보정당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위의 두 가지 목표의 성취여부를 기준으로 하여야 하나 두 번째 목표의 성취여부의 경우 비가시성으로 인해 이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어려운 데다 4 ․ 19혁명 이후의 혁신정당의 경우 5 ․ 16쿠데타에 의해 단명으로 끝났기 때문에 선거를 통한 의회 진출이라는 가시적인 결과를 통하여 그 성취 여부를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1960년 4 ․ 19를 포함한 4월민중항쟁으로 민주화의 가능성이 충분히 열린 가운데 등장한 혁신정당이 7 ․ 29총선거에서 참패한 원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7 ․ 29총선거 참패의 원인
진보당이 강제로 해체당하고 죽산 조봉암의 처형으로 상징되듯이 1950년대 이승만정권의 혹독한 혁신계 탄압으로 말미암아 혁신정당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가 4 ․ 19를 맞아 정치적 자유분위기 속에서 혁신정당운동은 다시 시작되었다.
4 ․ 19 직후부터 각 계열을 망라하여 혁신세력의 단합방안이 논의되었는데, 크게 사회대중당(‘사대당’), 한국사회당(‘한사당’), 혁신동지총연맹(‘혁련’)의 3대 주류로 나뉘어 7 ․ 29총선거에 임하게 되었고, 한사당과 혁련측은 ‘혁신세력 단일공천’을 추진하였으나 사대당의 복잡한 내부사정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혁신정당들은 모두 민의원에 161명, 참의원에 10명의 후보자를 내세웠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