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폐정개혁안
- 최초 등록일
- 2006.07.14
- 최종 저작일
- 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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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폐정개혁안
갑오농민 전쟁의 원인
갑오 농민전쟁 등의 농민전쟁을 통해 알아본 농민들의 폐정개혁안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지향점
갑오개혁
본문내용
갑오농민 전쟁의 원인
조선 왕조 말기에 부패한 정부 당국은 동학을 이단(異端)으로 몰아 닥치는 대로 잡아 처형하는 극심한 탄압을 가하였다. 이에 동학은 비폭력으로 저항하여 대신사의 신원(伸寃) 요구를 통해 신앙의 자유와 아울러 정치의 개혁과 외세 배격 등을 주장하는 집단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고부에서는 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이 극심하여 마침내 동학 접주 전봉준이 앞장서서 포 덕 35년(1894년) 갑오년 1월 10일(음)에 수천 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고부 군아를 습격하였다. 그러자 이를 평정하기 위해 당도한 안핵사(按 使) 이용태는 무고한 백성을 동학당으로 몰아 잡아 매질하고 민재를 약탈하며 불지르고 부녀를 겁탈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마침내 동학은 혁명의 기치를 올리고 고부의 전봉준을 비롯, 무장의 손화중, 태인의 김개남, 금구의 김덕명 등 각지의 접주들 주도 하에 고부 백산에 동학군이 모이게 되었니다.
갑오년(1894년) 3월 21일(음) 드디어 동학혁명의 횃불이 치솟아올랐다. 동학군은 격문, 창의 문, 행동 강령 등을 내세우고 동도대장(東徒大將) 전봉준을 선봉으로 오색의 각 포별 군기를 휘날 리며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양척왜(斥洋斥倭)를 표방하고 일제히 궐기했다.
동학군이 고부로 진격하자 안핵사 이용태는 도망가고 동학군은 고부 백산을 본거지로 대오를 정 비하여 태인과 부안을 점거한 후 도교산으로 이동하였다가 4월 7일(양 5월 11일)에 황토현에서 대승을 올리고 10여일 만에 정읍, 흥덕, 고창을 점거하였다.
동학군은 무고한 백성에게 피해가 없도록 12개조 군률을 세워 군기를 엄하게 하였으므로 가는 곳 마다 민중의 호응을 받고 그 세력이 날로 증가하여 연이어 무장, 영광, 함평을 점거하고 4월 23일 에는 장성의 황룡촌(黃龍村) 접전에서 홍계훈(洪啓薰)의 경군(京軍)을 대파하였다. 드디어 동 학군은 4월 27일 전주를 점거함으로써 호남 일대를 장악하여 서울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관군은 병력 부족을 조정에 호소하고 나약한 조정 대신들은 청국에 원병을 청하는 민족 반역을 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청국군 2천여 명이 5월 5일과 7일에 아산에 상 륙하고 일본군 또한 7천의 군사가 5월 6일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주했다. 이 때 동학군은 전주에 입성하여 호남 일대를 제압하고 서울로 북상하려다가 청․일 양국군 개입 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하여 북상을 중단하는 동시 관군과 협상을 개시한 끝에 폐정개혁안 실행 과 동학집강소(執綱所)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성립시키고 5월 8일에 전주성 을 관군에게 양도하였다.
그리고 폐정개혁안 제출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