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사기와 한서, 후한서
- 최초 등록일
- 2006.07.05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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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통사인 사기와 단대사인 한서, 후한서에 대한 글입니다.
목차
◎ 사마천의 『사기』
◎ 반고의 『한서』
◎ 범엽의 『후한서』
본문내용
사마천의 저술은 본래 『사기』라고 명명되지 않았다. 史記라는 어휘 자체는 매우 일찍 출현하였고, 사마천의 저술 속에서도 누누이 사용되면서 일반적인 역사서적을 두루 일컬었다. 사마천은 그의 「自序」에서 그의 저술이, 모두 130편, 52만 6,500자로 「太史公序」라고 하였다. 태사공이란 결코 어느 한 사람이나, 직책에 적용되는 전적인 호칭이거나, 겸칭의 성격을 지니는 것은 아니었고, 사관인 태사령을 지낸 모든 사람을 태사공이라고 했다. 까닭에 사마천도 태사공을 자신의 저술 속의 인물로 삼았다. 위진 이후에 이르러서 사마천의 저술은 『사기』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기라는 말이 역사서적에 대한 범칭에서 사마천 저술에 대해서만의 호칭으로 바뀐 것이다. 사람들도 사마천에 대해서도 왕왕 그의 본명을 직접 부르지 않고 태사공이라는 존칭을 썼다. 결국 태사공과 『사기』는 사마천 전유물로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단지 이 점만으로도 사마천의 영향력의 거대함과 사학사상에서의 그의 숭고한 지위를 알 수 있다.
태사공의 『사기』는 전설 속의 황제로부터 한무제 태초 년간에 이르는 총 3,000년 간 역사를 기술하였다. 그 가운데 비교적 간략하게 기술된 한대 이전 시기는 주로 『詩經』, 『書經』, 『左傳』, 『國語』, 『戰國策』, 『秦紀』 등의 고서들과 역사전설을 근거로 정리하고 편성한 것이다. 한대 이후 당대사의 기술은 비교적 상세한데 기본적으로는 사마천의 창작이다.
이러한 통사의 체제는 고금의 역사를 한 줄기 강물처럼 기술해서 연대를 이어가게 했고 전후관계를 연결시킴으로써, 역사발전의 경로를 드러내는 데에 유리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서의 매우 진보적인 체제였다. 그러나 통치사상은 제왕을 역사의 창조자로 삼았고, 역사는 개개 왕조의 교체에 불과하며, 평민은 사회와 역사의 발전법칙을 탐색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통사라는 체제 또한 고대의 사서 가운데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수의 진보적 사가들만이 태사공의 이러한 전통을 계승해서 일종의 통사의 가풍을 이루었을 따름이다. 결국 이것이 중국사학사 가운데서 주목할 만한 훌륭한 전통의 하나였다.
참고 자료
고국항, <<중국사학사-상>>, 풀빛,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