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고종시대 재조명
- 최초 등록일
- 2006.06.28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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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가 알고 있는 고종의 이미지는 조작된것이다..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위한 것!
그것의 자세한 비판과 분석을 한것입니다
목차
서장 : 고종시대사 흐름의 재조명-개항에서 광무개혁까지-
[제1부 편견과 오류 비판]
1. 고종황제 암약설 비판
2. 근대 한국은 과연 `은둔국`이었던가?
3. 18884년 갑신정변의 허위성-`일사내위 어서 위조의 경위
4. 1894년 6월 청군 출병 과정의 진상-자진 청병설 비판-
[제2부 근대화의 현장]
1. 고종의 국기 제정과 군민일체의 정치이념
2. 1880년대 고종의 개화를 위한 신도서 구입사업
3. 18-19세기 서울의 근대적 도시발달 양상
4. 대한제국의 서울 황성 만들기-최초의 근대적 도시개조사업
5. 고종황제의 항일정보기관 익문사 창설과 경영
본문내용
서장 : 고종시대사 흐름의 재조명-개항에서 광무개혁까지-
우리 역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1910의 병합의 충격에서 비롯하는 것이 대부분이다.이 사건으로 우리는 근대적인 사회를 스스로 만들 힘이 없었던 민족으로 생각하는 식자들이 많게 되었다.이러한 패배주의적 역사 인식은 특히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 역사와 대비를 통해 더욱 조장되어왔다.이러한 문제들을 자세하게 고찰하는 일은 오늘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유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여겨진다
군주 권을 제약하는 입법조치나 정당정치는 군주정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므로 군주를 중심으로 힘을 합쳐 나가야 할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판단이 내리고 있었다. 서양제도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지금까지의 군주정체제를 유지하면서 필요한 기술문명을 받아들여 개화를 해나가는 것이 바른길이란 결론을 내렸다. 이른바 동도서기론의 대응이 정론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동도서기론적 개화정책은 당초 국왕 고종에 의해 주도되었다. 개화정책을 국왕이 주도하면서 서양 정치제도를 외면했다면 그것은 군주의 독선에 따른 것으로 비칠 우려가 없지 않다. 그러나 당시 군주가 고수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유교정치 이념이 아니라 18세기 이래 탕평군주들이 시대변화에 조응 하여 갱신한 왕정관인 민국정치 이념이었다.영조 정조가 수립한 이 정치이념은 종래의 민본사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군민일체의 인식아래 신분적 불평등을 배제하는 세계를 구현하는 것으로 그 자체에 근대적 근대적 지향성이 뚜렷이 보이고 있다.고종은 이 정치이념을 받아들이면 내외적 기반도 저절로 확보될 것으로 믿었다.
이를 버리고 서양의 입헌군주제나 입헌공화제를 도입하면 정치의 주체가 흐트려져서 혼란만 초래될 것으로 인식하였다.
완전한 서양화 즉 서도기론 입장에서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려는 대응도 있었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친일 개화파가 선두주자였다. 김옥균 등의 친일 개화파는 주지하듯이 일본에서는 재야세력이던 자유민권 파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유민권 파는 서구의 정치제도로서 의회제도를 받아들여 민의를 대변하는 확립을 추구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