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난징 대학살
- 최초 등록일
- 2006.06.23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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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난징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일어났는지,
왜 이러한 대학살이 잊혀져야만 했는지에 대한
진지한 보고서입니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연결시켰기 때문에
군국주의에 대한 배경 지식도 들어있습니다.
<참고>
MBC 난징 관련 다큐멘터리
난징대학살 - 아이리스 장
전쟁책임 - 이에가나 사부로
전쟁과 인간 - 노다 마사아키
전쟁국가 일본 - 이성환
한.중.일 역사인식과 일본교과서 -일본교과서 바로잡기 운동본부
많은 책을 직접 읽고, 쓴 보고서이기 때문에
난징에 대해 알고 싶으신 분,
보고서를 쓰셔야 하는 분들께 굉장히 유용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목차
1. 난징으로 가는 길 - 난징대학살이 있기까지의 역사적 배경과 과정
2. 난징대학살의 배경 – 일본의 군국주의
3. 난징 대학살의 기억 : 현재
4. 결론
본문내용
<본문 중 발췌>
1) 살인 시합
- 누가 가장 포로들을 빨리 죽이는가?
한 병사가 포로의 목을 베면 다른 사람이 잘린 머리를 받아 한쪽으로 쌇아 올렸다. 포로들은 너무 놀라 자신의 동료가 차례로 쓰러지는 것을 보며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죽이고 수를 세고, 죽이고 수를 세고." 일본 명사들은 웃으며 살인을 했고 한 병사는 사진도 찍었다. - 생존자 탕슐산의 증언 中-
- 무카이도시아키, 노다 다케시 이 두 하급장교의 살인 경쟁
두 장교는 이 경쟁을 `친선게임`으로 생각했고, 무카이도시아키는 `재미있는것`이라고 말했다. 그 시점에서 승자를 가리지 못하자 두장교는 150명으로목표를 바꾸거나 1000명을 목표로하는 큰계획을 생각했다. 계획을 수정한후 두장교는 경쟁에서의 즐거움을 계속해 느꼈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무카이도시아키는 250명을 죽여 노다다케시를 크게 앞질렀다. 그래서 노다다케시는 1000명을 목표로 하는 경쟁을 무카이에게 제안했다." 자료 :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1938년 2월 9일자)
일본군은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통해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학살을 경쟁적으로 부추겼다. 신문은 이러한 살인 경쟁을 인터뷰하고 그 승자를 보도했다. 그러한 인터뷰는 살인자를 자랑스러운 행위를 한 인물로 조작했고, 그들의 용기는 기록되고 널리 알려졌다.
2) 고문
■ 산 채로 파묻기 ─일본군은 공장의 조립 라인처럼 정확성과 효율성을 위해 포로를 산 채로 매장시켰다. 군인들은 중국 포로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했다. 두번째 그룹이 첫번째 그룹을 파묻으면 세번째 그룹이 두번째 그룹을 파묻는 식이었다. 어떤 포로들의 경우는 얼마나 고통을 견디는지 실험하기 위해 가슴이나 목까지만 파묻히기도 했다. 이 경우 밖으로 드러난 부분을 칼로 자르거나 파묻힌 사람들 위로 말이나 탱크를 몰고 지나가기도 했다.
■ 사지 절단 ─일본군은 포로들의 배를 가르거나 목을 자르거나 손발을 자르는 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다. 나무 판에 포로를 못박은 후 탱크를 그 위로 지나가게 하거나 나무나 전봇대에 산 채로 못박거나 살을 베어내거나 총검술 훈련 대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불에 태워 죽이기 전 최소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눈을 파내고 코와 귀를 잘랐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200명의 중국인 군인과 민간인들의 옷을 모두 벗기고 학교의 기둥과 문에 묶어둔 다음 손잡이가 달린 특수 바늘로 입과 목, 눈을 비롯한 전신에 단검을 꽂듯이 찌르기도 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