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사]향교를 다녀와서
- 최초 등록일
- 2006.06.21
- 최종 저작일
- 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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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주 향교를 견학한 후에 작성한 레포트이다. 향교의 역사, 발전과 쇠퇴에 대한 설명과 함께 광주 향교에 대한 내용에 대해 작성하였다. 마지막으로 광주 향교를 다녀온 소감과 느낌을 기록하였다.
목차
향교의 역사
향교의 발전과 쇠퇴
광주 향교
광주 향교의 건물 및 시설
다녀와서..
본문내용
향교의 역사
향교는 고려·조선시대 유교교육을 위해 지방에 설립한 관학교육기관으로 `교궁` 또는 `재궁`이라고도 하였다. 향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등장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 안향이 중국 원나라에 가서 공자의 초상과 그의 수제자 10인, 문하제자 72인, 송조 6현자의 위패를 가져와 우리나라에서 제사를 드린 것이 그시작이 된다. 그러나 그 당시는 교육의 기능은 없이 제사만을 행했으므로 현대적인 의미의 향교라고 할 수는 없다. 수도를 제외한 각 지방에 관학이 설치된 것은 고려 이후로서 1127년(인종 5)에 인종이 여러 주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부터 향교가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향교에 적극적인 유학교육의 면모가 나타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왕조는 교화정책 가운데 근본적인 방법으로 지방민을 교육, 교화할 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1392년(태조 1) 각 도의 안렴사에 명하여 향교가 만들어지고, 또 잘 운영되는 정도를 가지고 지방관 평가의 기준을 삼는 등 강력한 진흥정책에 힘입어 성종 때는 모든 군·현에 향교가 설치되었다. 초기 향교는 고려 말에 나타나지만 지금 모습의 향교는 조선 건국(1392년)이후라고 할 수 있다.
향교의 발전과 쇠퇴
조선시대 억불숭유 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적으로 향교가 세워졌다. 1읍 1교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으나 지역마다 사정이 있었던 관계로 전국적으로 세워지지는 못했고, 태종 때 향교마다 학전과 노비를 하사하는 정책과, 향교의 발전여부에 따라 지방관의 인사고과를 매기는 정책으로 전국적으로 향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조선초기에는 대체적으로 향교가 잘 운영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본디 목적이 변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적은 보수로 인해 교수 확보가 어려웠고, 30개월의 임기가 잘 지켜지지 않았으며, 과거 급제자들이 지방에서 근무하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