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만주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 최초 등록일
- 2006.06.16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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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만주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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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많은 민족운동가들은 만주(현재의 동북3성 지역)로 이동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다. 이전부터 이 지역에는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와 한인촌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어 있었다.
북간도의 용정이 가장 먼저 개척되기 시작하여 이상설이나 김약연, 이동휘 등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고 이후 신민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서간도의 유하현 삼원포가, 이승희 등을 중심으로 북만주의 밀산이 개척되었다.
이렇게 국외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활발하게 추진되어 기반을 다져갈 때 즈음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였는데 이 소식이 만주에 전해지면서 3월 13일 서간도의 유하현에서, 북간도의 용정 서정대야에서 만세시위를 가졌고 북간도의 시위는 중국군에게 진압당하면서 13명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후 만주의 서북간도에서는 이러한 만세시위의 독립의지를 성숙시키면서 동시에 독립군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성과로 북간도와 서간도를 중심으로 약 70여개의 독립군 단체가 결성되어지는데 이들은 이후 북간도의 북로군정서와 서간도의 서로군정서로 통합되어진다. 통합된 독립군은 국내진입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하여 북로군정서는 두만강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서로군정서는 압록강을 중심으로 해서 국경의 일본 국경수비대와 각종 공공기관들을 침투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일본군들은 이러한 게릴라식 침투를 감행하는 이들을 쫓아 공격하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이긴 봉오동 전투(1920년 6월)이다. 이후 이러한 만주의 독립군에 대해 일본군은 그 주둔지를 토벌한다는 계획을 짜고 곧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일본은 마적단을 일본영사관에 침입하게 하였는데 이 사건이 혼춘사건이다. 이 사건의 조사를 빌미로 매우 많은 일본군을 만주에 주둔시켰고 곧 그들은 독립군 토벌의 계획을 실행하였다. 이에 독립군들은 이들과의 전투에서 불리할 것을 알고 피전(전쟁을 피한다)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백두산의 밀림에 숨어 피할 것을 계획하고 안도현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이들이 백두산으로 이동 중 이라는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곧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이 둘은 청산리에서 만나게 되어 전투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 까지 벌어져 독립군이 크게 승리한 청산리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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