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위정척사사상과 개화사상
- 최초 등록일
- 2006.06.15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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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위정척사와 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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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조선은 내부적·외부적으로 여러 가지의 당면과제를 떠안아야 했다. 먼저 내부적으로는 1801년 순조 때부터 이어져온 세도정치로 인해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등 조선 정부 내부의 부조리가 극심해졌고 이러한 것은 사회·경제로도 파급되어 극심한 혼란을 야기하였다. 한편 외부적으로는 서구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써 그들은 아시아 국가로의 침략을 통해 자신들의 시장을 확보하고 원료공급지를 장악하려 하였던 것이다. 종합해보면, 당시 조선의 당면과제는 내부적 개혁을 통한 부흥이라는 반봉건과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대책이라는 반침략(반외세)이었다.
이러한 조선의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기되었던 것 중 실제적 정책으로 이용되었던 것이 개화와 위정척사였다. 다음부터 개화와 위정척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개화사상은 1860년대부터 1870년대를 거치면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사상은 과거 18세기의 실학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과거 실학사상 중 이용후생을 주장하던 북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였던 박규수가 벼슬에서 은퇴한 이후 자신이 중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두고 연암집을 교재로 하여 북학파 중심의 사상으로써 후학을 가르쳤는데 그들 중에는 후에 대표적 개화세력이 되는 김옥균과 박영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형성된 개화사상은 이후 중인계층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역관이었던 오경석, 유대치와 이동인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개화사상의 핵심 내용은 서양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하루빨리 부국강병의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그 방법으로는 서양의 지식과 기술 등을 하루 빨리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개화사상은 점점 더 확산되었고 1870년대 말에 이르면 개화사상을 가진 이들이 정치세력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개화당이다. 개화당은 이후 유학생 파견과 함께 한성순보를 발행하면서 자신들의 지지세력을 더욱 더 넓혀 확고히 만들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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