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친일파에 대해서 학기말고사 대체 리포트로 보름동안 작성한것.
목차
서설 - 친일파 논의의 필요성
친일파의 개념과 등장
친일파의 형성 - 일제의 식민정책과 친일의 논리
1) 1910년대 친일파와 친일논리
2) 1920년대 친일파와 친일논리
3) 1930년대 이후의 친일파
친일파 군상
결어 -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심 세력인 친일파
본문내용
혹자는 친일파라고 했을 대 개화기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던 인사 중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던 이른바 변법개화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김옥균 등의 변법개화파가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정변을 일으켰고 이들 중 몇몇이 식민지시대에 들어 친일적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또한 민중사학의 관점에서 근대변혁의 주체를 농민층에서 찾고 있는 연구자들도 개화파가 이 시기 변혁주체가 될 수 없는 한계를 친일의 내외의존성에서 찾고 있다. 즉 식민지 시대 친일파의 뿌리를 개화기의 개화파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친일파라는 용어는 ‘외세와 친연성을 갖고 있는 정치집단’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민족적 정서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반역사적 행위를 한 매국노, 민족반역자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친일파의 개념은 가혹했던 일제 36년간의 식민지 경험을 배경으로 설정하여야 할 것이다. 즉 식민지화의 첨병 역할을 하였던 매국노, 식민지 시대 일제에 붙어 식민정책을 미화하거나 동족을 압박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목숨을 버리도록 부추겼던 반민족 범죄자들 등이다.
따라서 ‘친일=반민족’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 시대에까지 친일파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당시 우리에게 직접적 압력을 가해온 쪽은 일본이 아닌 청나라였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종주국 행세를 하면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민씨 세력도 이들에 기대어 개화세력을 정계에서 축출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19세기 말까지 각 정치세력들은 개혁의 모델을 청나라, 일본, 미국으로 삼으면서 그 성향에 따라 친청, 친일, 친미로 구분되기도 했다. 때문에 이시기는 ‘친일=매국’으로 보기도 어렵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시아연대론과 삼국공영론 처음 아시아연대론을 기반으로 하는 삼국공영론이 1898년 4월 7일 《독립신문》에 언급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나 황성신문은 일방적으로 친일논리에 경도되지는 않았고, 아시아연대론을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에 대한 야욕을 경계하는 논조도 나오고 있다. 그러다 러일전쟁기가 다가오면서 본격적 친일적 자세로 바뀌고 있다. 하원호, 「일제의 대한침략기에 친일의 논리와 실태」, 『친일파란 무엇인가』, 46-49면
등이 들어와 우리 언론 등에서 언급되기 시작하였지만 이는 러일전쟁기에 들어서면서 친일론으로 바뀌어갔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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