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로마제국 기독교 박해의 주요인
- 최초 등록일
- 2006.06.04
- 최종 저작일
- 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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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의 주요인들로서...논문요약한 글입니다....
목차
1. 서론
2. 대중과의 관계
3. 유대교와의 관계
4. 기독교의 순교관
5.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에 관하여 초대교부들의 견해는 일치하진 않았지만, 대략 10명의 황제를 뽑았다. 그러나 이 숫자는 일반적 박해로 본다면 너무 많고 속주와 지방의 박해로 보면 너무 적다고 하겠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를 보다 용이하게 개관하기 위해서는 박해의 성격과 규모를 따라 세 시기로 나누어 보는 것이 편리하다. 첫 번째시기에는 정부의 무관심하에 유대인에의한 박해였고 두 번째 시기에는 황제가 관여했지만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세 번째 시기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박해가 일어나지만, 그에 반해 교회가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기독교도들이 박해를 받은 이유에 관해서 2세기 이후의 거의 모든 박해기록들과 호교론들은 기독교라는 이름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기독교도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기독교도”라고 하는 이름의 의미와 로마제국의 당국자들이 이해하고 있던 이름의 의미가 전혀 달랐다고 하는 데서 일어난다. 이것은 로마제국이 단순한 무지에서 박해를 일으켰다기보다는 오히려 복잡한 정치 사회적 배경과 종교적 요인들이 얽혀서 박해를 야기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대중과의 관계
로마제국은 정치와 종교가 미분화된 고대국가의 하나였다. 정치가 종교를 지배하는 전형적인 전제정치체제였다. 그러기에 공화정을 무너뜨린 정치폭력과 음모, 무자비한 정복으로 영토를 확장한 군대의 힘에 의하여 제국을 건설한 정치권력이 스스로를 신격화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에서 승리하여 제국을 건설함으로써 100년간에 걸친 불안과 유혈 끝에 마침내 평화가 찾아오자, 로마제국의 사람들은 그를 신격화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태도를 받아들여 황제숭배를 로마예배와 결합하도록 명하였다. 정치가들은 황제구세주라는 이 종교적 개념에서 제국의 모든 부분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이념을 발견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