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상사]흥선대원군
- 최초 등록일
- 2006.05.26
- 최종 저작일
-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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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정치 사상사 시간에 흥선대원군의 생애와 정책에 관련한 내용
목차
1. 대원군의 생애
2. 대원군의 내정(內政)개혁과 왕권강화책
3. 대원군의 쇄국정책
1) 배경
2) 서양열강의 공세
3) 쇄국의 말로
4. 맺음말
출처
본문내용
이와 같이 대원군은 사상과 정치적분야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폭넓게 경제․사회면에 이르기까지 누적된 폐정(弊政)을 쇄신하여 봉건적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위정척사(衛正斥邪)`(봉건지배체제를 고수하며 침략이나 개화에 반대한다는 것)의 이념에 따른 대담한 양이쇄국주의정책(攘夷鎖國主義政策)을 추진함에 의하여 땅에 떨어져 있었던 왕조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정책방향에 합치되는 것은 채택하여 과감히 실천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용서없이 탄압․배제하려 하였다. 그 주요한 것을 들어보면 앞서도 언급한 바 있는 안동김씨 세력의 제거에 의한 왕권강화의 추진과 더불어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한 지방양반세력에 대한 억압이었다. 즉, 그는 지방양반지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재지적(在地的) 거점이었던 650여개에 달하는 서원을 정리하여 47개로 줄였다. 서원과 사우(祠宇)는 외관상 지방양반 및 유생들이 산림의 한적한 장소에 설치하여 유학을 강의함과 함께 그 장소와 연고가 있는 유현(儒賢)과 선열(先烈)을 제사하는 양반계층들의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는 도장(道場)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본질적으로는 양반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봉건세력의 재생산기관임과 동시에 보급기관이었다.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시대의 성리학자 안유(安裕)의 고향인 풍기군 죽계(竹溪, 현 영주군 순흥면)에 백운동(白雲洞)서원(지금의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창설한 이후 그 수는 급속도로 증가하여 대원군의 집정초기에 이르자 전국에 분포된 사액(賜額)과 비사액(非賜額)서원을 합치면 무려 650여개에 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지방의 양반․유생들은 서원을 서로가 경쟁적으로 설립하여 이것을 그들의 선사숭배(先師崇拜)와 문벌경쟁(門閥競爭)의 장소로 전화시켰다. 그 때문에 서원은 광대한 농장과 많은 노비를 소유함과 동시에 양반유생의 무위도식과 군역을 기피하는 특권적 전당(殿堂)으로 되었는가 하면 민중을 수탈하는 근거지로 되어 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학론의 중심지로서 당파를 결성하여 정담(政談)을 좋아했고, 그 지방의 여론을 좌우하는 등 은연히 정치에 대한 시론(時論)을 지배하기까지 하였다. 일례를 들면 노론의 송시열을 배향하는 청주목(淸州牧)의 화양(華陽)서원이 발하는 흑패(黑牌, 書簡)는 정부의 명령보다도 더 위력이 있었다고 한다.
참고 자료
http://www.naver.com
http://seoul600.visitseoul.net/index.html
http://www.zuri.co.kr
http://neuromed.k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