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돈황석굴
- 최초 등록일
- 2006.05.18
- 최종 저작일
- 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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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돈황석굴의 발전과 굴에 대한 사진과 설명
목차
서론
1.돈황석굴의 개관
본론
2. 수 · 당대의 돈황석굴의 발전
3. 수나라의 돈황석굴
427굴 / 420굴
4. 당나라의 돈황석굴
194굴 / 45굴 / 328굴 / 96굴 / 130굴 / 158굴
결론
5. 수 · 당대의 석굴의 특징
+참고문헌
본문내용
1.돈황석굴의 개관
돈황석굴이 뚫리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중반쯤으로 알려져 있다. 돈황이 중국의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기원전 111년으로 한나라 무재가 무위, 장액, 주천, 돈황등 하서사군을 설치하면서 부터이다. 이 지역은 월지, 강(羌)등 다양한 족속들이 뒤섞여 살았지만 흉노가 이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중국 변경지역을 끊임없이 침공하기 시작한다. 한나라는 이에 위청, 곽거병, 이광리 등으로 하여금 흉노를 진압하게 하고 여기에 만리장성과 진관을 서치한다. 돈황은 당시 서역도호부가 설치됐던 이지역의 중심지로, 크게 성황을 누린 오아시스도시였다. 5세기 초 서량과 북량의 전쟁때 페허가 되었지만 북위, 서위, 수, 당을 거치면서 더욱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돈황에서 25km 떨어진 사막속의 명사산 기슭에 막고굴이라는 불교사원이 개착되기 시작한 것이 4세기 중엽경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366년 낙준(樂僔)이라는 스님이 명사산에서 서광이 비친것을 보고 굴을 뚫기 시작하여 그 후 그후 그는 이곳을 수행장(修 行場)으로 삼아 머물렀다고 한다. 이때부터 막고굴이 시작되어 원나라때까지 약 1천년에 걸 쳐 수많은 사람들이 굴을 개착하고 불상을 조성한 것이다. 굴이 개착되기 시작한 4세기 이후 14세기까지는 크고 작은 굴이 1천여곳 이상이어서 말 그 대로 천불동이었다.
명사산은 동면 1.6km 절벽 단애면에는 당초 1천여개의 굴을 뚫었지만 현재는 492개의 석굴만이 어느정도 제 모습을 갖고있다. 그러나 한 석굴을 몇 개의 굴로 나누고 있으므로 이 숫자는 훨씬 줄어든 것이다. 적어도 2~3백개의 석굴은 아직도 천년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어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참고 자료
타와가준조, <돈황석굴>, 개마고원, 1999
문명대, <중국 실크로드 기행>, 한국언론자료간행회, 1993
최한수,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대원사, 2002
장준석, <중국회화사론>, 학연문화사. 2002